점프볼에 있는 글을 가지고 오다. 나는 허재가 NBA에 갔었으면 어땠을까를 꿈꿨던 자이다. 그의 농구실력은 정말 대단하였다...
□ 허재의 프로필
○ 소 속 : 원주 TG삼보 엑써스(배번 9)
○ 포지션 : 가드
○ 최종학력 : 중앙대
○ 생년월일 : 1965 년 9월 28일
○ 서전트점프 : 80 cm
○ 체격조건 : 188 cm / 78 kg 100m기록 : 13초
□ 허재의 농구인생
허재(1)
지난 84년 조던이 NBA에 입성한 이래 올해 은퇴할 때까지 줄곧 그의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아니 그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후세에게 충분히 부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운아다. 특히 올 시즌의 은퇴를 예측(?)하고 작년 97-98시즌 종일 미국에 머물면서 그의 마지막 플레이를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행운마저도 최대한 지어 짜듯 즐긴 것 같다. MSG에서 펼쳐지는 신의 농구 쇼를 생각하면…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년은 나에게 몹시 불운한 한해가 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허재의 플레이를 놓쳤기 때문이다. 76년 이래 24년간 계속된 ‘허재 지켜보기’에 단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역시 나는 행운아 일 수 밖에 없다. 역시 단순한 이유다. 허재의 초등학교 5학년 농구를 보기 시작한 이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그의 플레이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허재(2) No. 6
70대 후반부터 농구를 접하면서 가장 처음 알게 된 선수는 유재학이다. 허재의 2년 선배인 그는 농구 신동이라고 소개되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타덤에 올랐던 불세출의 가드이다. 허재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줄곧 두 수 정도 앞선 기량으로 좋은 스승이자 넘어야 될 산으로 그의 앞에 있었다. 등번호 6번을 달고서..
보통 농구 선수는 첫 인상으로서 플레이를 규정짓기가 힘들뿐더러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자꾸 지켜보다 보면 괜찮아 지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여기에 무척 예외적인 선수가 내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다. 바로 78년 고대 신입생으로서 그 해 고연전에서 신들린 샷을 선보이며 화려한 신고식을 했던 이충희가 그 주인공이다. 그 날의 기억은 너무나 또렷해서 당시 스코어 84:84는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무승부인 이날 경기의 유일한 승자는 이충희 뿐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영웅 등번호 6번…
70년대 말 MBC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던 NBA를 통해 국내팬에게도 잘 알려진 필라델피아 76ers의 닥터 J ? 줄리어스 어빙 ?은 여타 선수와는 차별적인 농구를 했다. 슬램덩크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농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칭송을 받는 기술 농구의 달인이었다. 그의 농구를 보면서 감탄에 빠지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역시 No. 6..
현재 9번을 달고 뛰고 있는 허재가 예전에 애지중지 하며 고집하던 번호가 바로 6번이었다. 이와 같이 필자가 농구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보아 왔던 스타들의 번호가 모두 6번이다 보니 나는 한동안 6번이 팀의 최고 에이스에게나 부여되는 번호로 착각했던 때가 있을 정도였다.
어쨌건 이 시절 나는 혼자서만 품고있는 - 즉 학교나 부모에게 말하지 않을(?)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유재학과 허재가 빨리 커서 이충희와 한 팀을 이루어 뛰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소원은 예상외로 유재학이 대표팀 합류가 늦어지면서 근 7,8년을 기다린 끝에 이루어졌다. 어쨌건 87, 88년 대표팀에서 이 세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 이 시절의 얘기는 후에 다시 한번 하기로 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 나의 흥미거리 중에 하나는 등번호 정리에 관한 문제였다. 누가 6번을 달고 뛸 것인가에 관한...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6번은 유재학이 이충희는 8번, 허재는 7번을 사용하는 것으로 6번 쟁탈전은 정리되었다. 사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을 사소한 일이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궁금해왔던 초미의 관심 사로서 허재에 대한 추억의 하나라고 생각되어 아까운 가상 세계의 공간을 낭비하며 끄적여 본다.
허재(3) 상명초등 / 용산중학
허재가 농구를 시작한 시기는 상명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당시 이 학교에는 유재학이라는 농구 신동이 허재의 2년 선배로 있었다. 유재학은 그의 초등학교 경기를 TV에서 중계를 하고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주목받고 있었다. 앞의 글에서 언급 했다시피 유재학은 본받아야 할 선배로서 혹은 넘어야 될 라이벌로서 허재 앞에 있었다.
단언컨대 청소년 시절의 허재에게 가장 적절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이들 둘 사이에는 감독과 선수라는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는 천재의 자존심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인가, 나래(현삼보)와 대우(현신세기)의 게임에서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끼곤 한다.
허재는 이 시절부터 다분히 스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도 허재의 특기는 현란한 드리블에 의한 개인 돌파 였으며 농구를 혼자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어떤 대회에선가는 1점을 뒤진채로 종료 부저 소리와 함께 자유투를 얻었다. 당시 가슴에서 투핸드로 던지는 초등학생의 자유투는 정확도가 매우 낮았으며 특별히 왼손잡이 허재는 외곽슛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위기에 강한 이 꼬마 스타는 어김없이 2점을 보태서 팀을 우승시키고 학교의 스타가 돼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허재의 유일한 패배는 소년체전에서 xx도 대표팀과의 경기에서였다. 그 팀에는 나이를 속이고 출전했다고 밖에 믿어지지 않는 거인이 하나 있었다. 당시 이와 같이 부정 선수가 소년체전에 출전하는 것은 흔한 일로서 성적 지상주의가 부른 결과였다.
그 경기는 그 거인과 허재간의 1대1싸움이나 마찬가지 였고 슬프게도(?) 허재는 패배했다.허재도 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날이었다. 그 만큼 ‘허재 = 승리’라는 도식이 성립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허재는 78년도에 농구 명문 용산 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 시기의 그의 농구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관찰 기회가 많지 않아서 서술할 내용이 많지는 않다. 아마 당시에는 이충희의 농구에 매료되는 바람에 신체적이나 기량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중학농구가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적지 않게 직접 관전한 그의 경기에서 그는 여전히 돋보였다. 드리블이라던가 볼 핸들링 능력, 그리고 코트비젼 등은 왠지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국내 성인 농구선수보다 앞선 것으로 느껴졌다. 이 시기에도 어김없이 유재학이 그의 2년 선배로 있었으며 허재에게 등번호 6을 전수하고 경복고로 진학했다.
이와 같이 허재의 소년기는 좋은 농구 환경과 선천적인 운동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했으며 착실한 기본기를 다질 수 있었던 시기라고 정의될 수 있겠다.
허재(4) 용산고교 / Asia Youth Championship
허재가 용산고 1학년이던 81년 당시는 유재학의 경복고 전성 시대였다. 남상만, 김윤호등과 팀을 이룬 유재학은 그 해 전국대회를 휩쓴다.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유재학의 특징은 광각렌즈를 장착한 듯한 시야, 낮고 불규칙한 드리블, 그리고 경기를 읽는 영리한 머리였다. 또한 작은 신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인사이드를 파고 들었다. 개인기로서 인사이드로 파고들어 수비 전열을 부순 후 내,외곽에 생겨나게 마련인 찬스를 살리거나 이가 여의치 않으면 직접 레이업을 올려 놓는 기량은 당시 성인 농구에서도 보기 힘든 감탄스런 기량이었다.
이런 유재학의 스타일에 힘과 오기 그리고 높이가 덧붙여진게 허재의 고교시절 농구였다. 비록 허재가 1학년때 쌍용기 대회의 우승을 이끌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는 했었지만, 본격적인 신고식은 고교 2년 때부터 라고 해야 할 듯 싶다. 그러니까 82년 봄에 다시 본 허재는 그 전의 허재가 아니었다. 신장이 거의 다 자란 상태였으며 몸에 근육이 붙게 되기 시작하면서 파워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의 맞수는 임달식이 있던 휘문고였다. 휘문은 내외곽에 걸쳐 좋은 선수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허재를 만난 죄로 2년동안 결승전의 단골 희생양이 되어야했다.
용산에는 포인트 가드 허재, 현재 나산에서 활약중인 이민형이 센터를 맡았고 연대를 거쳐 기아에서 활약했던 고 한만성이 외곽 슛터로서 활약했다. 때마침 불었던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바람을 타기도 했지만 당시 용산고의 플레이는 빈번히 TV에 중계될 정도로 고교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허재도 초고교급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화려하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유일한 패배는 허재가 3학년이던 쌍용기 대회 예선에서 대 휘문과의 경기였다. 이 경기는 다음날 언론에 의해 `병주고 약준 허재`란 머릿기사로 보도 되었던 경기이기도 하다. 전반전 내내 죽을 쑤던 허재는 후반 들어 맹추격을 하기 시작해서 급기야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2점차 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2초를 남긴 상황에서 휘문의 자유투. 여기서 허재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그때 휘문의 선수가 자유투율이 별로 좋지 않은 선수임을 파악한 허재는 김병철-현재 동양의 김병철이 아님 -에게 뭔가를 귓속말로 지 시했다. 1구를 실패하고 2구째를 던지는 순간 김병철은 뒤도 안보고 냅따 휘문의 골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관중이나 벤치에서도 의아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2구마저 실패한 공은 허재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휘문 골밑에 혼자 있던 김병철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는 게 아닌가. 연장전을 기대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어의없게 김병철이 이 공을 놓지고 만다. 라인 드라이브성의 이 패스의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이었다. 물론 결승전에선 용산고는 예선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을 한다.이 시기에도 허재를 시기하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허재의 존재를 이민형과 한만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묘사했다. 물론 이 두선수가 훌륭한 선수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것은 허재 선수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언젠가 용산고는 서울시 지역대회에서 예선 탈락을 한적이 있다. 이땐 허재가 청소년 대표로 차출되어 자리를 비운 시기였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고교시절 허재가 휘문에 있었다면 임달식이나 신성식, 이완규는 훨씬 각광받는 유망주가 되었을 것이며, 원래의 예정대로 고대에 진학을 했다면 당시 즐비하던 고대의 외곽 슛터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허재가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하면 그 팀엔 허재로 인해 빛을 보게 될 새로운 스타가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허재는 고교 2년 시절,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유재학, 남상만, 김윤호, 김유택 등과 팀을 이뤄 참가한다. 허재가 중국과 처음으로 맞부딪치는 경기라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대회였다. 그러나 이 대회에선 중국과 필리핀에게 연패를 당하고 만다. 특히 필리핀과의 경기에선 경기장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는 등 전혀 기대치 못했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후 84년 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선 허재는 82년 대회를 설욕하며 청소년 농구의 대미를 장식한다. 당시 멤버로는 허재, 이민형, 한만성, 김영철, 김종석 등이 있었다. 이전해인 고3시절에 있었던 일본원정 순회 경기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며 일본 농구계의 주목을 이미 받고 있던 터라 대회 시작 전부터 `한국의 6번만 막으면 승리`라는 각팀의 전략이 서있던 대회이기도 했다. 결승전에서 만난 중국은 허재에 의해 농락당하고 만다. 만일 누군가 허재 경기 비디오 컬렉션을 생각한다면 이 경기를 꼭 구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허재의 청소년기 농구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경기였다. 허재는 이 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 ‘혜택’은 결과적으로 굴레가 되고 만다. 5년간을 동일 직종, 동일 근무처에서 종사해야 하는 그것마저도 대학 졸업 후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병역특례법에 따라 93년 봄이 되도록 해외 진출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허재(5) 80년대 초의 한국농구와 허재의 등장
허재가 고교무대를 평정하고 있을 당시 국내 성인 농구는 외곽 슛터들의 전성시대였다. 황유하, 진효준, 이충희, 이민현, 최철권, 박수교, 신동찬, 박인규, 김현준, 오동근 등등
포지션에 상관없이 슛에 관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훌륭한 선수가 무더기로 배출되었던 시기였다. 이들 중에서도 이충희는 단연 독보적인 선수였다. 고연 정기전에서 처음 봤던 이충희의 슛은 신기 그 자체였다. 상체를 뒤로 젖힌채 던지는 페이드 어웨이 슛이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던지는 슛, 완벽한 레이업 찬스에서도 오히려 외곽슛으로 가볍게 끝내 버리고 유유히 돌아서는 모습등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이 많은 스타들을 탄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농구는 다소 기형적인 것이었다. 외곽의 화려한 플레이에 치중한 나머지 인사이드 플레이가 실종된 것이다. 센터의 역할은 수비 리바운드와 슛터를 위한 스크린 플레이가 전부였고, 페네트레이션을 할 만한 개인기를 보유한 가드진이 없었다. 따라서 볼의 흐름은 빠르기는 했지만 다양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러한 약점은 국제 대회를 통해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마는데 79년 나고야 ABC 대회에선 중국은 물론 일본에게까지 대패(100:85)를 당했으며, 81, 83년 ABC에서도 중국을 넘지를 못했다. 스코어가 문제가 아니라 경기 내용이 문제였다. 인사이드 없는 농구는 전망이 없어 보였다.
이런 와중에 기적같은 일이 발생한다.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의 우승이었다. 결승전, 대 중국전의 주전 멤버는 박수교,이충희,이민현,임정명 그리고 신선우가 뛰었다. 이 날 승리의 주역은 단연 신선우였다. 이충희는 전반전에 큰 활약을 했지만 후반전에 오픈 찬스를 번번히 놓치는 등 난조를 보였다. 이 날 신선우는 한국의 인사이드 플레이를 되살려냈다. 용산고, 연대, 현대를 거치면서 가드, 포드, 센터를 겨쳤던 그는 불운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이다. 볼 핸들링과 시야가 좋았으며, 상대 센터를 등지고서 펼치는 리드미컬한 드리블과 피벗 플레이가 일품이었다. 서전트 90cm의 탄력에 순발력이 있었다. 종전까지 외곽으로만 돌던 볼이 가운데로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흐름의 입체감이 생겼다. 센터로서 득점은 많이 올리지 못했지만 무수히 많은 찬스를 제공하면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후 신선우는 무릎 부상의 악화로 더 이상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현대에서 재기하는가 했으나 결국 부상으로 단명하고 만다.
83년 ABC에선 중대 진학을 앞둔 고교생 신분의 김유택이 국가대표로 데뷰한 대회이기도 하다. 교체 멤버로 코트에 들어선 김유택은 승부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깜짝 놀랄 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중국선수와의 리바운드 경쟁에서 뒤지지 않았고, 겁없는 블록킹 시도를 하고, 센터 수비를 해냈다. 신장과 웨이트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대신 스피드와 푸트웍이 월등했다. 그 후 김유택은 서장훈이 등장하기까지 국내 최고의 센터로 골밑을 지켜왔다.
개인적으로, 그의 기량이나 플레이의 완성도에서 불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센터 플레이어로서 10년 이상을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농구대잔치 통산 25xx개의 리바운드(1위), 4009 득점(4위), 7xx 수비 포인트(1위) 기록이 김유택을 받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허재가 한국 남자농구 전면에 등장한다.
허재(6) 중앙대 농구의 신화 (1)
84년 봄 허재는 농구계의 관심속에 대학 무대 데뷰전을 갖는다. 고교에서는 수퍼스타 대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대학 1학년 풋내기에 불과한 그의 기량이 대학 무대에선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세인들의 관심 거리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엉뚱하게도 퍼머 머리를 한 채로 다소 생경한 모습을 보이며 코트에 등장한다. 예선 첫 경기부터 엄청난 활약을 하며 단지 몇 경기만에 초고교급 선수에서 대학의 최정상급 반열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를 해버린 허재는 결승전에서 당시 최강인 고려대와 맞붙는다. 이 경기를 생각하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경기 중반쯤 허재는 원맨 드리블 쇼를 펼치며 자기 편 코트에서부터 5명의 고대 선수를 차례로 돌파하는 신기를 보여준다. 속공도 아니고 빈 공간을 빠르게 파고 드는 그런 드리블이 아니라 느린 듯 하면서도 타이밍을 뺏는 ‘진짜 개인기’를 보여 주었다. 농구는 이런 것임을…
이 날의 우승은 중대 신화의 시작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반면, 한편으론 이날 경기부터 유감없이 발휘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는 운명의 짐을 짊어진 날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승부가 이미 갈린 후반전에 발생한 한기범 선수 집단 린치 사건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명백한 집단 폭력 사건이었다. 일방적으로 밟히고 맞던 한기범이 결국 대걸레를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그 후 한기범은 태릉 선수촌에서 한번 더 대걸레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중대 농구 또는 중대 농구를 대표하는 허재 선수가 왜 한국 농구계에서 반항아가 될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당시 중대 농구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외곽 의존적인 기존 농구와는 전혀 다르게 철저하게 인사이드를 공략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더블 포스트에 한기범, 김유택, 포드에 이경영, 강정수 그리고 포인트 가드에 허재가 포진한 중대는 매 경기 100점 이상을 쏟아 부으며 대학을 평정했다. 새로운 볼거리에 팬들은 열광했다. 2년뒤 가세한 강동희가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슛팅 가드로 변신한 허재는 그의 재학 4년간 대학팀간 경기에서 한 게임도 놓치지 않고 전승으로 팀을 이끈다. 이미 그의 1학년 시절부터 대학팀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현대와 삼성이 버티고 있던 실업 농구와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재(7) 중앙대 농구의 신화 (2)
83년 겨울부터 시작된 농구대잔치(점보시리즈)는 첫 시즌인 83-84 시즌에 현대에게 우승을 안기면서 화려한 출발을 하였다. 당시 현대와 삼성이 벌이던 용호상박의 대결은, 비록 과열된 승부욕이 만들어낸 부작용이 존재하기는 했었지만, 농구의 질을 높이고 팬을 경기장으로 모으는데 큰 기여를 했다.
허재는 84-85 시즌 신인왕을 타내면서 화려하게 데뷰를 한다. 중앙대는 84-85 시즌과 국가대표 차출로 비정상적으로 운용된 85-86 시즌에서 일약 4강권에 진입하며 정상급의 실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두 시즌동안 삼성과 현대의 벽을 단 한 차례도 넘지를 못했다. 접전을 펼쳤던 경기도 다소간 있었지만 많은 경기에서 큰 스코어 차이로 무릎을 꿇었다. 일견 보아서는 압도적인 높이와 화려한 개인기, 안정된 외곽을 지닌 중대가 삼성, 현대에 비해 뒤질게 없어 보였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내부적으로 중대의 농구는 완성도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았다.당시에는 파격적인 림 위에서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연신 블록킹을 성공시킨 쌍돛대였지만 툭하면 파울 트러블에 걸리고 이지샷을 연거푸 놓치는가 하면 승부 고비처에서 자유투 ? 당시에는 One and one ? 를 연신 까먹는 김유택과 한기범은 전체적으로 봐선 마이너스 전력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최근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중대 농구의 특징인 과도한 턴오버도 그 당시에도 여전히 많았다. 허재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그 만은 거의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경기운영능력, 찬스 제공 능력, 골밑 돌파에 의한 득점력 등 이전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화려한 기량을 뽐내며 고군분투 했다. 하나 아쉬운 점은 화려한 기량에 비해 외곽슛 성공율이 저조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누구보다도 허재 스스로가 잘 알고 뼈져리게 느꼈던 분야라고 생각된다. 특히 삼성, 현대와 대결을 하다보면…
이러한 중대의 전력은 당시 정상을 놓고 격돌하던 현대와 삼성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대비된다. 일단 이 두 팀의 플레이에는 실책이 매우 적었고 주어진 기회를 반드시 스코어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따라서 외견상 중대의 농구가 우세해 보이더라도 실속은 이 실업 선배팀이 챙긴 셈이었다. 그리고 현대에는 이충희가 삼성에는 김현준이라는 보증된 스코어러가 있었다. 특히 이충희는 중대만 만나면 날아 다녔다. 이충희를 수식하는 여러가지 표현이 있지만 가장 적합한 말은 ‘신들린 슛터’라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아무도 저지하지를 못했다. 볼을 받는 위치가 그의 슛팅 레인지에 있고 그를 마크하는 수비수가 두세걸음만 떨어져 있으면 필요충분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뱅…...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페이트어웨이샷이 터진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만 반복되다 보면 상대팀은 전의를 상실한다. 이충희와 함께 당대 최고 슛터로 이름을 날린 김현준이 이충희와 비교되는 미세한 차이가 이런 점이 아닌가 싶다. 주저하지 않는 자와 다소 신중한게 플레이를 하는 자가 주는 느낌.
강동희가 가세한 86-87 시즌 농구대잔치에서 중대는 절호의 정상등극 기회를 잡는다. 후에 정봉섭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다시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김유택(4학년), 허재(3학년), 강동희(1학년)로 짜여진, 이른바 허동택 농구가 탄생한 역사적인 시기였다. 1,2,3차 리그를 통해 물고 물리는 접전을 계속하던 현대와 중대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는다. 당시 전적이나 스코어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중대는 억울하게 물러서고 말았던 것 같다. 여기서 굳이 억울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당시 심판의 자질이나 실업팀의 더티 플레이가 승부의 결과에 승복 할 만한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87-88 시즌은 다소 유감스러운 시즌이었다. 허재와 강동희의 중대 농구는 이전의 다소 덤벙거리던 약점에서 벗어나 충분히 안정화되었다고 보았는데 그만 준결리그서 선배로 구성된 기아 농구팀에게 예의차원(?)의 패배를 당하고만다. 이로서 허재의 중대는 정상권에 꾸준히 머물기는 했었지만 아쉽게도 최정상에 등극하는데는 실패를 한다. 그러나 허재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약진의 시기였다. 매년 놀랍게 변해가는 허재의 기량을 보면서 그의 기량을 기존의 잣대로 재려는 나의 시도는 한낱 부질 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허재가 1학년이던 84-85 시즌 직후 그러니까 실업팀의 공포의 외곽 농구에 좌절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더 이상 이 바닥에서 농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NCAA에 진출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허재는 이런 나의 생각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어디에 소속되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레벨의 선수였던 것이다.
허재(8) 전성시대 (1)
허재의 전성기를 규정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대학시절을 이야기 할 것이고, 다른 이는 농구대잔치 5연패를 하던 시절, 아니면 연고대의 기세를 뚫고 다시 2연패를 이룩하던 시절을 이야기 할 것이다.
리더쉽과 노련미가 가세된 지금은 또 어떤가. 어쩌면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 정상에서 내려온 적이라도 있었던가… 하지만 나의 취향으로만 본다면 여타 시기와 다소 구별되는 그의 전성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기아산업에 입단한 후 현대와의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 며 농구대잔치 3연패를 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그 이전과 비교했을 때는 훨씬 더 공격 지향적인 플레이를 했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시기와는 게임에 임하는 성실도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88년 허재의 입단으로 기아산업은 한기범, 김유택, 유재학, 강정수, 정덕화, 한만성을 보유한 초강팀이 되었고, 허재는 게임 리딩 역할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인 스코어러로 변신하게 된다.
입단 첫 해 88-89 시즌에선 유재학과 처음 파트너를 이뤄 환상적인 패스웍과 공격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며 첫 우승을 일궈냈고, 강력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 89-90 시즌에선 득점왕을 차지하며 2연패를 엮어냈다. 90-91 시즌에는 강동희가 가세했다. 당시 강동희는 1차, 2차 대회에는 상무팀 소속으로 뛰면서 득점,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던 중 이었다.
때마침 유재학이 발목 부상으로 도중 하차를 한 때라 강동희는 제대 후 자연스럽게 유재학의 자리를 대체했다. 강동희가 상무 소속일 때 허재와 두 차례의 맞대결을 벌일 기회가 있었는데 싱겁게 허재의 완승으로 끝나버렸다. 다소 긴장한 강동희가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면이 많았고, 특별히 플레이의 높이에서 두 선수간의 차이가 많이 났던 것 같다. 당시 허재는 득점왕과 MVP를 따논 당상일 정도로 맹활약 했으나 챔피언 결정전에서 임달식과의 폭력 시비에 휘말려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하고 만다.
이 당시의 허재 플레이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드리블-
허재의 플레이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분야이다. 그의 드리블은 상황과 목적에 맞도록 변화한다.리딩 가드로서 볼 키핑이나 운반 능력이 요구될 때는 철저하게 불규칙한 드리블을 치면서 절대로 타이밍 을 읽히지 않는 플레이를 한다. 높이, 방향, 속도에 변화를 주는 이런 불규칙 바운드를 구사할 줄 아는 선수는 현역에선 그 말고 강동희, 임재현(중대)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높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포스트업 시에는 놀랄만큼 빠르고 힘있는 리드미컬한 드리블을 구사하면서 중심 이동을 가져간다. 손목힘이 탁월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술로 국내 파워 포워드 그룹의 교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페네트레이션 시에는 몸의 중심에서 최대한 멀리 볼을 떼어 놓은 채 땅바닥에 붙어 있는 듯한 낮은 드리블을 유지하면서 돌파를 한다. 이런 기술 습득이 되지 않는 한 현재의 수많은 유망한(?) 국내 포워드 그룹들은 한계를 노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한가지 더. 허재 드리블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양손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선호하는 위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제일 적합한 플레이를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프로 출범 후 허재의 드리블은 스피드와 높이에서 다소 약화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리그 최고 수준의 드리블을 보여 주고 있는 탁월한 드리블러라고 할 수 있겠다.
-어시스트-
허재는 농구대잔치 통산 어시스트 1위의 기록(782개)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로 출범 이후에도 포인트 가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시스트 분야 상위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어시스트에 능한 선수이다. 특별히 그의 어시스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어시스트에는 순리대로 팀플레이에 충실하다 보면 만들어지는, 말하자면, 포인트 가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어시스트가 있는 반면에 득점 상황을 창조해내는 ‘메이킹 어시스트’가 있다. 허재는 바로 후자에 능란한 선수인 것이다.
보통 코트에서 뛰는 선수보단 벤치에 있는 코치가 코트를 넓게 볼 수 있고,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벤치보다는 해설가나 기자들이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어쩌면 코트 전체를 한 눈에 관망할 수 관중석이 훈수를 하기에 더 적절하지 모른다. 그래서 관중은, 기자는, 해설자는 그리고 코치는 자신이 발견한(?) 찬스를 이용할 줄 아는 선수를 칭찬하고, 그러지 못하는 선수를 욕하면서 대리 만족을 경험한다.자, 허재는 어디있는가?
당연히 코트 안에서 뛰고 있는 선수이다. 그런데 허재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패스길을 찾아내고 어시스트로 연결한다.
허재에게는 이러한 화려한 어시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 98-99 시즌 나래의 경기를 관전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허재 - 존슨으로 이어지는 포스트 투입 작전을 보는 것이었다. 비록 존슨의 스냅이 엉망이고, 꼭 원 바운드 드리블을 하려는 이상한 버릇 때문에 기대만큼 성과는 거두지는 못했지만 허재가 마크맨 너머로 존슨에게 투입하는 패스웍의 세련미는, -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아무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어시스트를 동시에 해내는 선수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중장거리
샷-
고교, 대학까지의 허재 플레이의 최대 약점은 외곽 슛이었다. 더군다나 기복도 심한 편이어서 이 분야에 관한 한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인 게 사실이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슛에 관해서는 천부적이지 못했던 그는 엄청난 노력으로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기아산업 입단 직후인 88-89 시즌부터는 놀라운 적중력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3점슛 부분에서 농구대잔치 통산 1위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고 만다.
(652점).
다른 선수와는 달리 스스로 슛 찬스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한참 슛터로 명성을 날리던 시기에는 공만 잡으면 삼점슛을 노리는 등 슛에 대한 못말리는 자신감을 보여주곤 했었다. 그의 외곽슛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그의 폼에 관한 얘기다. 점프를 하면서 그 탄력을 받아 슛을 던지는 보통 선수와는 달리, 높은 점프와 탁월한 스냅을 보유한 그는 점프의 정점에 올라선 때 볼을 릴리스하는 호쾌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허재(9) --------- 전성시대 (2)
-페네트레이션-
허재의 돌파에 이은 레이업을 보고 있으면 농구의 득점 체계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페네트레이션은 단순한 2점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예술적 점수라도 따로 매겨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할 때가 있다. 그의 레이업을 단순한 득점으로만 보거나 단지 멋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별로 의미가 없다. 그의 모든 기술이 녹아있는 총체적인 플레이로서 감상을 해야한다. 페네트레이션에 들어가기 전의 몸짓.
두 발 사이에 볼을 넣은 채 시도하는 가벼운 아이훼이크 또는 풋훼이크 에서부터 첫번째 마크맨을 드리블로 제끼고, 두 번째 헬핑 디펜스는 스피드로 어깨 하나를 앞질러서 달고 들어간다.
멈짓 멈짓 하면서 타이밍의 변화를 주면 포스트에 버티는 상대 센터는 슛 타임인지 패스 타임인지를 혼돈하게 되고 결국 적절한 블록킹 타임을 놓치게 된다. 그 후에 비로소 레이업이 감행된다. 여기서도 그의 마지막 비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높고 긴 체공력과 허리와 손목의 강한 힘은 마지막 순간에 올라오는 블록킹을 따돌리고 더블 클러치나 어시스트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허재는 국내 경기보다 장신자가 즐비한 중국과의 대결에서 상대의 넋을 빼앗는 이런 플레이를 상습적으로 구사하곤 했다. 허재가 페네트레이션의 첫 스텝을 밟기 시작하면 중국의 수비 진영이 도미노 마냥 우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프로 출범 이후 최근에는 낮아진 점프로 인해 허재는 이런 고난도의 플레이를 구사하는데 한계를 보여주면서 타점 낮은 언더슛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 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팬들 입장의 성을 채우지 못하고 있으니 마냥 아쉬울 뿐이다.
-리바운드-
놀랍게도 그는 농구대잔치에서 전체 3위에 해당하는 개인 리바운드 기록 (1411개)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이 기록의 대부분은 대학 1년부터 기아산업 초기 3년간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당시 그가 득점은 물론 어시스트와 리바운드에도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허재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내용이다.
솟구쳐 올라 한 손으로 낚아채듯 건저내는 리바운드 기술, 상대 선수를 등지 고 점프를 뛰는 기술, 순발력을 바탕으로 연속적인 리바운드 다툼에서 이기는 모습등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기억속에 남아있다.
체력 최근까지 거의 풀타임을 소화해내는 그의 체력은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6년 초 태릉 선수촌에서 실시한 체력 테스트에서 내노라 하는 투기 종목이나 장거리 육상 선수를 제치고 허재가 전체 2위를 차지했던 일은 당시 체육계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허재 농구를 찬찬히 살펴보면 화려한 고난도의 테크닉, 정교한 슛에 의한 농구뿐 아니라 힘을 앞세운 저돌적인 농구가 한 축에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체적 조건이 좋은 선수는 앞으로 얼마든지 나오겠지만 과연 허재만큼 체력이 좋은 선수가 배출될 수 있을지는, 테크닉적인 면에서 그의 후계자가 나타날 것인가를 찾는 만큼이나 결과가 의문시되는 사안이다.
허재가 지금이라도 민완 가드 정도만의 역할로 활동 범위를 축소한다면 체력 문제로 은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그 외 수비, 인터셉트, 경기운영, 승부 근성, 절대 치사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자존심, 리더십등 농구에 필요한 요소를 골고루 지니고 있음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일 것이다. 굳이 만능 플레이어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전에서 덩크를 구사하는 능력 이나 파울없이 샷 블록을 수행하는 능력 정도가 지적된다. 흔히 허재의 NBA 가능성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가 많은데 나의 개인적 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허재는 기본이 잘 되어있는 선수이다.
그의 드리블, 어시스트, 체력, 농구에 대한 이해나 센스는 외부 환경과 별 상관없는 그만의 세계로 구축되어 있다. 이런 능력은 수 많은 국제 대회를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요소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본다. 반면 상대에 따라 평가가 영향을 받게되는 내,외곽 득점 능력, 수비력 등은 검증이 필요한 분야로서, 해당 리그 의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한 분야이다.
쿠코치가 그랬고 디바치, 사보니스 모두 그랬다. 결론적으로, 나는 허재의 자질로 보아 90년도쯤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면, 얼마간의 적응 기간을 지나 성공적인 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믿고있다.
허재(10) --------- 중국과의 일전
허재가 대학 1년때인 84년은 국제 대회가 없었던 관계로 아예 국가대표 구성이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따라서 허재의 국가 대표로서의 경력은 85년 부터 시작된 셈이다. 83년 ABC 직후 대표팀 주전 가드였던 박수교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다. 허재는 85년 대표팀에 선발되자 마자 이 자리를 물려받아 주전 가드 자리를 꿰차게 되고 신동찬과 더불어 가드진을 구성하게 된다.
85년 쿠알라룸프르ABC 대회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센터진 (한기범과 김유택)을 구성해서 중국과 맞대결을 펼치게 된다. 그 이전까지의 외곽 일변도인 기형적 농구에서 벗어나 인사이드에서 정면 승부를 거는 모험이 시도된 것이다. 경기 초반 의욕적으로 기 싸움을 펼치며 골밑 공방을 벌이던 이날 경기는 한국의 쌍돛대가 너무나 쉽게 파울 트러블에 걸리면서 또 다시 골밑을 점령당하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날 경기는 마지막까지 쫓고 쫓기는 양상으로 펼쳐지면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접전으로 전개되었고 그 한가운데 대학 2년생인 대표팀 루키 허재가 있었다.
이 날의 명장면 하나를 소개하자. 허재는 경기 중반 속공 찬스에서 중국선수를 앞에 두고 좌우로 번갈아 반복 되는 몰아치는 드리블을 구사하며 수비수를 몰고 있었고, 백코스를 하는 중국 선수는 공 구경도 못한 채 방향 전환만 되풀이 하면서 자기편 코트쪽으로 뛰어 가다가 베이스라인에 몰리고 말았다. 여기서 허재는 완벽한 스톱 모션에 이은 레이업을 구사했고 중국선수는 보너스 샷 하나를 선물하면서 자신의 스피드를 이기지 못하고 베이스 라인 밖의 사진 기자들을 덮치고 마는 진풍경 을 보여주고 만다.
비록 이 날 경기에서 한국은 중국에 패하고 말았지만 허재는 이충희와 더불어 베스트 5에 뽑히면서 일약 아시아 최고수 자리에 오르게된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0세.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은 홈에서 펼쳐지는 만큼 중국 타도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몇 가지 불운이 닥쳤다. 부상에서 회복되어 대표팀에 다시 선발된 주전 센터 조동우가 대회 얼마 전 부상 재발로 로스터에서 제외되었고 경기 당일 허재는 발목 이상으로 경기 내내 벤치를 십수차례씩 들락거리면서 어려운 경기를 해야만 했다.
결국 5점 ~ 10점 사이를 반복하면서 잡힐 듯 잡힐 듯 하던 경기는 그대로 마감되고 말았다. 허재의 대 중국전 2패째의 순간이었다.87년 방콕 ABC에선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을 겪었지만 결국 아쉽게 분투를 삼키고 만다.
대 중국전 3연패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회에선 이충희가 준우승팀의 핸디캡을 딛고 MVP를 받았으며, 허재는 베스트 5에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가치를 인정받았다.
올림픽을 앞두고 개편된 87년 대표팀은 사상 최강의 외곽 라인을 갖춘 호화 진용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충희, 김현준, 허재, 유재학이 포진한 대표팀은 그 진가를 곧바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만 존스배에서 비록 대학팀 이지만 미국팀을 꺽고 좋은 성적을 냈으며, 87년 서울 프레올림픽에선 예선에서 유고 실업 선발팀(86년 유럽 최우수선수 보유)을 격파했고 결승에선 체코 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한국팀은 허재에 의한 원온원, 김유택이 상대 센터를 끌고 나오는 올-아웃, 이충희를 타겟으로 하는 패턴 플레이등 다양한 공격 전술과 끊임없이 변하는 수비 패턴을 무기로 관중을 흥분시켰다. 특히, 매 경기마다 보통 6, 7 차례의 연속된 빠른 패스로 슛팅 찬스를 만들어 내는 노 드리블 & 무빙 패스 게임을 선보이며 관중석의 관객뿐 아니라 경기를 관람하던 다른 팀의 선수까지 흥분해서 코트로 뛰어 나오게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88년 서울 올림픽의 첫 게임에서 한국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어이 없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충희와 이문규가 경기 전날 무단 외박에 이은 음주로 방열 감독의 제재를 받는 바람에 정상적인 선수 기용이 안된 이 경기는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그러나 대표팀은 마지막 예선전인 대 유고전에서 한국 농구 사상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87년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의 주역이던 쿠코치, 페트로비치, 디바치, 라자등 전,현 NBA 스타들이 버티고 있던 유고와의 이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전을 오히려 리드를 했고 후반까지 접전을 피는 등 센터진의 절대적인 열세속 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농구를 보여줬다. 이러한 상승 기조에 힘입어 9, 10위 순위 결정전에서 마침내 중국을 넘는데 성공한다.
또한 올림픽 이 후 일본에서 열린 초청 대회에서 다시 한번 중국 대표팀을 누르면서 중국전 징크스를 탈출한다.이 시절 허재는 인터뷰에서 중국 농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곤 했다.그러나 89년 북경 ABC에서 한국은 무려 30점차의 완패를 당하고 만다. 강동희가 처음으로 대표로 출전한 이 대회에서, 다소 방심했을 법한 한국은 절치부심한 중국에게 큰 스코어 차이로 무너진 것이다.중국은 절대 스피드가 부족한 초대형 센터 전략을 포기하고 높이가 낮더라도 기동력을 보유한 센터진과 강력한 파워 포워드를 무기로 85년 ABC 이후 정면 대결을 벌이며 맞짱을 뜨던 껄끄러운 상대 한국을 보기 좋게 제압하게 된다.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이 변화된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허재 - 강동희의 투 가드 시스템을 선보인 한국은 절대적인 가드진의 우세를 바탕으로 철저한 30초 지연 작전을 펼치며 중국을 유린했다.허재와 강동희 는 월등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중국 코트 전체를 내 집 안방인 양 드나들면서 도 절대로 완벽한 찬스가 아니면 슛을 던지지 않는 여우같은 작전을 구사한 끝에 대어를 낚는가 싶었으나, 3분 가량을 남기고 체력 저하에 의한 연속적인 턴오버 3개 (강동희 2개, 허재 1개)를 저지르면서 분투를 삼키고 말았다.
한국의 이와 같은 작전은 93년 상해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다시 한번 선보일 기회가 있었다.당시 실업선발로 팀을 구성한 한국은 경기 종료 1분전까지 리드를 잡았으나 막판 위기 관리 부족으로 역전패를 당하고 만다.
이와 같이 치열했던 80년대 중반에서 90년까지의 중국과의 일전은 근소한 한국의 열세로 판정이 난다. 당시의 경기를 통해서 얻은 패배의 공식이자 승리를 위한 해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40분 풀타임을 뛰면서 컨디션을 최적의 상태 로 유지하고,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발휘하기는 무리다. 어렵더라도 중간 중간 휴식을 제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후보 선수의 기량 향상 및 대비 전략 마련이 필수적이다. 마지막 5분에 강해지는 전략이 요구된다.
둘째, 상대 센터에 의한 1차 공격 저지율은 꽤 높았던 반면, 포워드 그룹에 의한 세컨드 리바운드에 이은 이지샷 실점에는 속수 무책이었다.
수비력과 리바운드력을 갖춘 포워드가 득점력있는 슛터보다 우선 기용되야 한다.
셋째, 김유택, 한기범 라인은 전반 초반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전반전 후반이나 후반전 초반이 되면 이미 파울 트러블에 걸리거나 5반칙으로 코트를 물러나게 되고 치명적인 전력 손상을 가져온다. 이 둘은 동시에 기용되지 말고 서로를 백업해 주어야 하던지, 볼륨있는 센터와 파트너를 이루는 방법이 연구되어야 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이것이 당시 전력의 한계 상황으로서 누구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90년 초반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다. 너무나 아쉬웠던 80년대의 중국과의 혈투에서의 주연이 이충희, 조연이 허재였다면, 허재가 주연이 되어 승부를 책임져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재(11) --------- 악운 그리고 불운 : 그를 위한 변명 (1)
농구 9단 또는 농구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농구 선수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인기와 성취를 누리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은 험난했던 과거가 그의 이력 뒤편에서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중대 시절이 그래도 맘 편하게 농구에 전념하면서 거칠 것 없는 상승세를 타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편파 판정과 실업팀의 거친 견제로 인하여 경기 거부라든가 사소한 다툼이 있긴 했었지만 어쨌건 졸업 후 실업팀 선택의 칼자루를 쥐고 있던 쪽은 허재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허재의 고생길은 그가 실업 양대 산맥의 호의(?)를 무시하고 기아산업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서바이벌 게임
허재가 입단한 88-89 시즌에 기아가 기어코 우승을 일궈내자 본격적인 허재 견제가 시작된다. 문제는 이 견제의 수준이 정상적인 농구 룰 밖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파울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덤벼드는 더티 플레이는 더 이상 농구이기를 포기한 일종의 격투기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심판이 통제하기를 거부하는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오른 뺨을 마저 내놓던지 아니면 맞대응을 하던지… 그 외엔?
당시 허재에게 가해지던 양상이 바로 이런 더티 플레이 수준이었다.그런 와중에서도 특히 손영기와 임달식은 허재와 악연을 자청했다. 이미 89년도에 허재의 안면을 강타해서 코뼈를 눌러 앉힌 적이 있던 삼성의 손영기는 92년도 경기에서 이미 공을 잡고 스톱모션에 들어가 있던 허재에게 스틸을 가장한 ‘돌격앞으로’를 두 번 연속 감행해 장딴지 부상을 입혀 놓는다.
허재 대신 기용된 기아의 김형균은 똑같은 방식으로 손영기에게 보복을 하기에 이르고 결국 이 게임 이 후 손영기와 김형균은 코트에서 볼 수가 없었으니, 심판의 무능력과 삐뚤어진 승부욕이 불러온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90-91 시즌의 임달식 사건의 경우도 최초의 파울에 대해 악의적인 파울을 선언할 만한 심판의 상황 판단과 자질만 있었어도 후속적인 불행한 사건이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격한 파울을 해놓고도 오히려 분해하면서 나자빠진 선수를 노려 보고 있는 상대방에게 어떤 예의를 보여야 매너 좋은 선수가 되는 건지를 나는 모르겠다. 결국 이 사건으로 허재는 MVP를 날려 버렸고,
자격 정지에 국가대표 탈락이라는 커다란 불운을 겪게 된다. 허재가 심판이나 상대 선수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그의 매너나 인간성이 형편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허재가 어이없게 당하는 것을 오랫동안 같이 지켜본 심정적인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허재의 매너를 따질 정도로 농구 예절에 관심이 있다면, 우선 더티 플레이를 일삼는 선수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것과 더불어 과거 연,고대나 삼성,현대 선수들이 보여준 볼썽 사나운 난투극이나 치졸한 경기 매너에 형평을 맞춘 기준을 허재에게 적용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술, 술, 술
음주 문제로 허재 만큼 구설수에 자주 오른 스포츠맨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허재는 술과의 악연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중대 시절의 음주는 삭발같은 다소 애교스런 징계로 되돌아 오더니만, 93년 친선경기를 앞두고 마신 술은 소속 구단 징계와 엉뚱하게도 국가대표 제외라는 고배를 안겨주고 만다. 나이트클럽에서 무례한 취객과의 시비도 술 때문에 생긴 일이고, 세계 젊은이의 축제라는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의 음주는 선수 자격 정지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중징계로 이어졌다. 93년 아들 순산을 기념하던 술 자리는 음주운전으로 연결돼 면허를 앗아가더니만 97년의 무면허 음주운전은 구속과 함께 그동안 그를 변호하던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안긴 사건이었다.
몸 버리고 돈 버리는 술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술을 끊고 운동에 전념해서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지? 라고 따져보고도 싶지만 나는 도저히 그런 식으로 몰아 부칠 수가 없다.왜? 나를 포함해서 주위의 내가 아는 - 직위고하나 공인, 자연인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볍게 시작한 술이 2차, 3차로 이어지고 그러다 취하고, 실수하고 다음 날 후회하고 하는 일상을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초등학교 바른 생활 시험 문제라면 틀림없이 ‘허재의 잘못’에 O 표를 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이다.
허재(12) --------- 악운 그리고 불운 : 그를 위한 변명 (2)
감독 그리고 선수
만약 천재형의 재능을 지닌 새로운 직원이 나의 동기라면, 혹은 그가 나의 선배던지 내가 그의 선배 혹은 더 나아가 내가 지시, 감독해야 할 부하 직원이라면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할 것인가의 문제를 허재에게 적용시켜 보면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먼저 후배 입장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결론이 나온다. 한마디로 실력있는 선배를 두고 있다는 것은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교시절부터 중대, 기아를 거쳐 현재 나래에 이르기 까지 그의 후배들은 허재를 잘 따르며 허재의 플레이 스타일에 최대한 적응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기나 선배는 문제의 수준이 다르다. 재능있는 후배를 위해 자신의 위치를 양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실력은 안되니까 어정쩡한 규율이나 군기로 통제하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는 오히려 허재로 인해서 상대적인 피해를 보는 부류가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모든 환경을 허재 주위에서 관찰하게 된다. 고교시절 용산고의 코치는 허재에게는 별로 잘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 세례를 펴면서 이끈 반면에 동급생인 이민형, 한만성에게는 심한 구타를 곁드린 스파르타식의 훈련을 강요하면서 결과적인 차별 대우를 저지르는 모양새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중앙대의 정봉섭 감독은 허재 스카우트 당시 그의 동급생을 한명도 뽑지 않는 등 일종의 허재에 대한 배려를 해주기도 한다. 허재의 선배중에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희생을 했던 선수도 있던 반면 아집과 시기로 늘 트러블을 일으킨 선수가 동시에 존재했다.
감독의 문제로 주제를 옮겨가면 더욱 복잡한 양상이 전개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감독-선수와의 관계를 스승-제자의 관계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업팀에서 감독-선수와의 관계는 일반 직장에서 상사-부하의 관계에 더 근접하다. 일반적으로 상사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실력이 있는 사람이며, 경험이나 고급 정보가 부하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에 부하 직원을 이끄는데 별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상사의 자질이 형편없던지 부하의 실력이 월등해서 둘 간에 의견이나 노선이 팽팽하게 상충될 때 발생한다. 이 또한 일반 직장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파워 게임이나 한쪽의(주로 부하) 일방적인 희생에 의해 승부가 갈리며 그 대신 승자는 이로 인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방열 감독과의 트러블에서 허재는 승리했지만 반면 최인선 감독과의 그것에는 굴복했다. 두 사건에서 표면적인 이유는 MPV 선정 문제, 경기 사보타주, 팀 전술에 마이너스라는 이유로 기용을 거부한 행위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오랜 기간 쌓인 갈등의 골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표면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양자간의 문제가 반드시 이런 투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풀리지도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근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래 블루버드의 신임 최종규 감독은 취임 인터뷰에서 시카고 불스의 필 잭슨과 마이클 조던과의 관계를 예로 들며 자신과 허재와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정립해 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방법이 한 천재적인 선수가 출현할 때 그를 갈등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보고 있다. 최종규 감독의 실험이 주목된다.
해외 진출
허재는 한국 농구 선수 중에서는 비교적 해외에 잘 알려져 있고, 다수의 해외팬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대학 시절부터 아시아권의 각종 대회를 통해 아시아권(특히 일본, 대만, 중국)에 많은 팬을 확보했고, 기아산업 시절 매년 행해지던 동구권과 북구의 기아자동차 프로모션 투어용 원정 경기를 통해서 유럽 농구에 잘 통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의 농구 관계자는 미국식의 뭐라 할까 다소 괴물스러운 개인 농구와 대별되는 허재의 정교한 개인기에 바탕을 둔 농구를 주목했다.
대만의 권위있는 농구 대회인 존스배를 통해서 맞붙게 되는 미국 대학 선발팀과의 경기는 허재를 미국 농구계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급기야 90년대 초 두 차례에 걸쳐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미국 2부리그 격인 CBA의 참여를 제의 받는다. 당시 기아와 농구협회의 협조 거부와 병역 문제, 또 NBA로 진입하기 위한 미국의 선수 수급 제도의 올바른 이해 부족이 겹쳐 결국 별 부담 없이 성사될 수 있었던 허재의 미국 진출은 성사되지 못했다. 요즘 프로 선수들의 미국의 세미 프로에 참여해서 경험이라도 얻고 오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보면 당시의 불허 방침이 얼마나 오만했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경우와 차원이 다른 일생일대의 찬스가 95년 다가왔다.94년 캐나다 토론토 세계선수권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허재를 눈여겨본 NBA 신생팀인 밴쿠버 그리즐리스 구단은 계약금 3백만 달러, 연봉 80만달러에 허재의 스카우트를 제의한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미국행을 결정했어야 할 이 절호의 찬스는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당시 아시안 클럽 선수권 대회 참가차 서울을 비우고 말레이지아 있던 허재는 반신반의 하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서울의 허재 가족은 허재를 대만에 보내기 위한 물밑 작업을 거의 성사시켜 놓고 있던 터라 당시 에이전트를 자청한 한창도 감독과 트러블을 일으키고 만다. 더욱이 허재의 연고권을 갖고 그에 대한 매니니먼트 책임이 있는 기아는 허재의 대만행을 막느라 정신이 팔려서 NBA 접촉은 꿈에도 꾸지 못했으니 한국, 아니 아시아 최초의 NBA 입성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허재 자신은 물론, 가족, 에이전트, 소속 구단이 모두 힘을 합해도 될까 말까 한 프로젝트가 순전히 전략 부족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웠던 95년 가을의 일이다.
물론 허재의 진출이 꼭 NBA에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상징적인 의미가 컸으며, 아시아 농구의 한계와 가능성을 허재를 통해서 검증해 볼 수 있던 기회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은 사건이었다.
허재(13) --------- 자존심의 농구
누구라도 인정하듯이 허재는 농구에 대한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높은 기대 수준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이 때문에 다소 오만하게 보이거나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자존심이 그의 강한 승부 근성과 맞물려 단지 실력만 가지고는 성취할 수 없는 경이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자존심이 표출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대학과 실업 초반 시기의 허재는 본인은 물론, 소속팀에게도 항시 최고가 될 것을 주문했다. 모든 경기마다 봐주기 없는 농구를 하며 다득점 연승 행진을 이어 나갔으며 허재 스스로도 농구의 모든 부분에 욕심을 내며 화려한 농구를 지향했다. 화려한 어시스트와 드리블은 물론이고, 외곽슛을 던진 후엔 습관적으로 리바운드를 위해 달려드는 열정과 근성을 보여줬다. 득점에서도 얼마나 많은 골을 잡아내는가 보다는 얼마나 멋있는 플레이를 하는가가 중요해서, 하나 하나의 득점 형태가 똑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황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득점을 일구어냈다. 따라서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수비등 개인 기록 전분야에 걸쳐 항상 5위 안에 랭크되며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사실 마이클 조던의 초창기의 플레이를 (비록 NBA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어도)기억하는 팬은 90년대 불스 왕국 시대의 황제 조던에 다소 실망(?)했을 법한 것처럼, 필자에 있어서 90년초 까지의 허재는 그 후의 허재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정도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기아에 강동희가 가세하고 김유택의 위력이 나날이 새로워 지던 시절, 그래서 기아가 농구 대잔치 5연패를 하던 그 때, 허동택이라는 신조어가 매스컴에서 회자되던 그 때 한국 농구는 허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한마디로 허재에게 한국 농구판은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그토록 힘들게 이루었던 농구대잔치 3연패 후 더 이상 올라갈 목표가 없어진 때, 더구나 점점 강성해 지던 기아의 전력을 보고 있노라면 수성의 의미조차도 장난처럼 느껴질 때, 이 때 허재는 떠났어야 했다. 사실 기아와 허재는 게임에 임하는 자세와 성실도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다. 최강이라던 기아는 약체인 금융팀에게 심심치 않게 발목을 잡히는가 하면, 대학팀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은 한 수 가르켜 주는 입장에서 농구를 하다가 점수차가 벌어진 후반엔 느슨한 플레이로 어이없이 경기를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허재 개인적으로는 외곽슛에 의한 쉬운 득점에 치중하다 보니 허재 특유의 고난도 플레이를 보여주는 기회가 점점 적어졌다. 득점력은 오히려 증가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약세를 보여줬다.그럼에도 어쨌건 허동택은 너무 강했고, 특히 결승 리그나 라이벌 팀과의 대결에선 언제나 허재가 살아나며 92-93 시즌까지 농구대잔치 5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장신 유망주가 대거 대학으로 유입된 90년 중반부터 기아는 힘겨운 도전을 받게 된다. 멤버상으로 여전히 최강으로 평가 받았던 기아팀이었지만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전력 우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예선부터 어려운 경기를 벌이는 경우가 증가했다. 급기야 93-94 시즌에서는 8강전에서 김영만, 양경민의 중앙대에게 무너지면서 4강 진입에도 실패했고 우승컵은 당시 서장훈이 가세한 연세대가 차지하게 된다. 94-95 시즌에선 서장훈의 연대, 95-96 시즌은 현주엽의 고대의 위세에 눌려 예선전 순위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우승 후보 1순위 자리를 내놓게 된다. 당시 기아팀은 공격을 전개하는 능력에선 허동택의 워낙 뛰어난 개인기로 커버할 수 있었지만, 체력과 부상 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했고 수비가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아는 94년부터 다시 농구대잔치 2연패를 이루는 위업을 달성한다. 물론 이러한 위업의 한가운데에는 허재가 있었다. SBS, 삼성, 고대, 상무를 상대로 치뤘던 94-95 시즌과 95-96 시즌의 결승 리그를 통해서 우리는 허재의 농구쇼를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이러한 일련의 시합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허재의 플레이에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농구는 허재하기 나름’이라는 농구 격언이 왜 생겨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즐기던 농구에서 감동하는 농구로 농구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옮겨지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때부터 허재의 자존심이 새롭게 내 시야에 들어왔으며 이 자존심이 바로 허재를 지탱하는 축임을 알게 되었다.그의 자존심은 위기가 닥치면 더욱 진가가 발휘된다. 어쩌면 그는 항상 위기를 스스로 몰고 다니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기를 즐기는 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고대를 포기하고 중대를 택한 것이며 삼성, 현대를 마다하고 기아에 합류한 것, 망신창이 된 몸으로 명예회복을 이루었던 지난 97-98 시즌 최종 결승 시리즈의 투혼, 다시 명문 기아를 버리고 신생 나래로 이적을 감행한 사건 모두가 그의 농구에 대한 자존심이 표출된 형태가 아닌가 싶다.
허재(14) --------- 중국을 넘어라 (1)
서장훈, 현주엽이 고교 농구 무대를 평정하던 91, 92년부터 농구계는 새로운 기대감에 술렁되기 시작한다. 하드웨어적으로 전혀 차원이 다른 이 두 선수의 출현은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한국 농구계의 새 희망이었다. 당시 대표팀은 이미 최고 수준의 가드진을 보유했고 문경은과 같은 장신 슛터가 등장했으며 한국팀의 취약 포지션인 포워드 그룹에 정재근이라는 유망주가 있었다. 또한 김유택이 건재했고 전희철이 그를 받쳐주고 있었다. 따라서 대표팀은 로우 포스트에서 버틸 수 빅맨 센터와 강력한 파워 포워드가 다른 어떤 포지션보다도 절실하던 처지였다. 이 때 서장훈과 현주엽이 등장한 것이다.
허재와 서,현이 함께 뛰는 대표팀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드림팀이었다. 필자는 94년부터 이 드림팀이 본격 가동될 수 있을거라 의심치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이 세 선수는 서로 엇갈리면서 최강의 전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국 격파라는 숙원도 한낮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된다.
91년 고베 ABC 대회에서, 비록 이충희가 빠졌지만 김현준이 워낙 쾌조의 상태였고, 허재와 강동희가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때라 한 번 해볼 만한 전력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대회 일주일 전에 열린 미국 대학팀과의 평가전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 경기에서 허재는 다분히 중국을 염두해 둔 플레이를 펼치느라 의도적으로 미국팀의 골밑을 공략한다. 흑인 선수를 대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탄력을 과시하던 허재는 경기 종료 수 분을 남겨놓고 리바운드에 참여하다 상대의 파울로 코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만 오른손등 골절상을 당한다. 결국 깁스를 하고 참가한 ABC에서 허재는 준결승까지 한번도 경기에 참여를 못하고 벤치를 지킨다.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깁스를 풀고 코트에 나서기는 했지만 도저히 정상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가 없었고, 한국은 마지안, 공샤오빈의 중국에 유린당하고 만다.
93년 상해 동아시아 경기에서는 허재, 강동희의 맹활약으로 중국을 다 잡았으나 막판 체력 부족으로 아쉽게 분루를 삼키고 만다. 만약 한국이 실업선발이 아닌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전희철이 포함된 국가대표팀을 파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드는 대회였다.93년 11월 자카르타 ABC를 앞두고 농구협회는 허재를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어의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허재가 어린 유망주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외한다는 농구협회의 발표는 한마디로 코메디였다.
드림팀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던 대표팀의 결과가 어떠했는가? 승부라든가 스코어는 나중 문제였다. 실마리를 전혀 풀지 못하는 답답한 게임 전개는 결국 허재의 가치를 확인해 주는 성과만을 올렸을 뿐이었다.다시 대표팀에 합류한 허재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중국과 격돌한다. 서장훈, 전희철등 신인 유망주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 대회에서 허재는 내외곽에서 거칠게 없었다. 사실 그 동안 중국팀은 허재를 한 번도 효과적으로 봉쇄한적이 없었다. 아니 봉쇄하기가 불가능했다. 중국 전력이 무서운 건 그들의 탄탄한 체격 조건과 착실한 기본기에 기인한다.
하지만 허재와 같은 테크니션을 상대하기에 그들의 개인기는 너무나 밋밋했다. 허재의 스텝과 방향 전환에 무수한 파울만 양산해야 했던 중국이었다. 이 대회 결승 허재의 카운터 파트너는 후웨이동이 나섰다. 후웨이동은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허재를 원천 봉쇄하는데 성공한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이 중국을 공략하던 허재에게 후웨이동은 전반 10분이 지난 시점에서 이미 4개의 파울을 저질러 벌인다. 무릎을 사용해서 허재의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히는, 한번도 듣도 보도 못한 희안한 비책에 허재는 쓰러지고 코트밖으로 물러선다.허재가 빠지자 마자 리드하던 경기는 순식간에 뒤집히고, 한국팀은 보호자 잃은 양떼처럼 우왕좌왕하다가 대패를 당하고 만다.
94년 토론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은 사상 최초로 8강 진입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편 한국도 이 대회에서 3승을 따내며 가능성을 보여준다.가능성의 한 축은 역시 허재였고, 다른 한 축은 서장훈이었다. 서장훈은 게임을 거듭할수록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면서 안정된 리바운드를 공급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마도 이 대회가 허재, 서장훈, 현주엽이 같이 뛰었던 유일한 대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배경을 두고 개최된 95년 서울 ABC는 한국과 중국의 진검 승부가 예상되는 대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장훈이 대표팀에서 빠지면서 김빠진 승부가 되고 말았다. 94-95 농구대잔치 준결승에서 당한 파울의 휴유증으로 도미중이던 서장훈은 코칭 스태프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합류하지 못했다. 당시 대표팀은 루키 현주엽과 전희철이 골밑에서 실력 이상의 맹활약을 보여주며 선전했고, 허재가 대회 MVP에 선정될 정도로 한층 농익은 기량을 과시했으나 문경은을 필두로 한 외곽 슛터의 극도의 부진속에서 중국에 10점 가량 뒤진 채 경기를 끝내야 했다. 경기 후 서장훈과 문경은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대회였다.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센터 없는 농구로 참패를 했던 한국은, 97년부터 허재를 제외한 채 새로운 대표팀을 구성한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97년 부산 동아시아 대회에선 22세 이하 중국 대표팀을 예선에서 물리치며 자화자찬식의 승리에 도취되더니만 결승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만에게 패하며 우승컵을 내어주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97년 사우디 ABC에선 허재, 서장훈, 현주엽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중국을 꺾고 아시아 정상에 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낭보를 듣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경계가 풀릴대로 풀린 중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의미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여겨졌던 일본에게 뒷덜미를 잡힐 정도로 불안해진 한국팀의 전력이 오히려 걱정되는 대회였다.
허재(15) --------- 중국을 넘어라 (2)
두 시즌의 프로 경험을 살려 다시 한번 패기있게 도전한 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최악의 부조화를 보이며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문경은은 경기 내내 여전히 헛돌고 있었고 현주엽은 무리한 플레이로 일관했다. 강동희는 경기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이상민의 특색 없는 경기 운영에 실망했다. 나는 이상민의 빠른 스피드나 속공 전개 능력, 또한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할 줄 아는 영리함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대 중국전과 같이 자신보다 장신이면서 스피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상대방을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나, 맥도웰에게 볼 투입하듯이 서장훈에게 투입하면 서장훈이 알아서 나머지를 처리할 정도로 중국이 골밑이 나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그의 플레이는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기를 바탕으로 코트의 어느 한 부분에서의 힘의 균형을 언밸런스 상태로 만들고 여기서 파생되는 찬스를 활용하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반면 나름대로의 성과도 있었다. 서장훈은 간혹 무리한 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한국 농구 사상 유례가 없었던 센터에 의한 최다 득점과 함께 무수한 리바운드를 걷어냈다. 비록 그 리바운드가 주어 먹기 식의 그것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 쉬운 리바운드조차 못해서 속태워야 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한층 진일보한 발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성과가 있었다면 역시 허재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한번 공감대를 얻었고 그것이 이번 대표 선발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아닌게 아니라 99년 8월 후쿠오카 ABC를 앞두고 새로 개편된 대표팀은 최근 10년만에 처음으로 실속을 차리고 네임밸류나 학연, 연고를 떠나서
분명한 목적 의식하에 소집된 팀이다.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강동희를 계속 기용키로 한 것부터 일단 다행이다. 아마도 이번 대회부턴 이상민이 스타터로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강동희가 맡아줘야 할 몫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또한 반쪽 자리 슛터는 모두 제외하는 결단을 내리면서 그 자리에 조상현과 같이 슈팅뿐 아니라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수비, 미들존 리바운드에서 활약이 기대되는 루키를 선정한 것도 마음에 든다. 조상현은 허재의 백업으로 나서면서 팀의 활력을 주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영만, 현주엽과 같은 수비 능력과 함께 다양한 공격 옵션을 지닌 선수를 기용한 것은 장진송, 후웨이동과 같은 내외곽에서 모두 강세인 중국의 포워드층을 상대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센터 포지션. 물론 서장훈의 비중이 절대적이겠지만 그의 체력과 파울 부담을 고려한 정경호의 선발은 현 시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일 것이다.이번 대표팀 구성에서 가장 고무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중국의 거센 파워 포워드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지난 방콕 대회에서 현주엽은 공샤오빈에게 역부족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엔 그 자리에 박재헌과 이은호가 보강되었다. 어쩌면 현주엽의 설욕전을 기대해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중국의 전력이 두려운 건 센터진 때문이 아니었다. 한 명의 센터는 서장훈의 몫으로 남겨두면 충분하다. 어차피 중국은 두명의 빅맨을 동시에 기용하지는 못한다. 전반 후 또는 후반 초에 의도적으로 몰아 부칠 포워드진의 거센 골밑 공략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이제서야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제대로 반영되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허재가 있다. 허재의 가세는 중국팀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나타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의 전력은 허재의 플레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중국은 다분히 서구의 높이와 체격을 염두해둔 농구만을 준비해 왔다. 아마도 중국이 의외로 대만에 매번 고전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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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허재의 엔트리패스에 대한 내용도 있고 해서..
TG의 창단 첫 우승,"보물"김주성의 프로데뷔,잭슨의 무시무시한 클러치 능력등으로 기억되는 02~03시즌은 "농구천재"허재가 성인무대 데뷔후 처음으로 풀타임 포인트가드로 뛴 대회였습니다.
포인트가드로 뛰어도 충분한 센스와 재능을 타고났다는 평가와 함께 본인스스로도 PG로 뛰었어도 충분히 성공했을테지만 이상민,강동희가 있기에 자신이 그 포지션에서 뛸 필요가 없었다 라고 밝혔었는데...
▶전성기의 허재
PG허재를 생각해보기전에 전성기의 허재의 플레이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보면
국내무대에서는 거의 올라운드 였지만 가장 가까운 움직임은 슈팅가드-스몰포워드 였다고 생각하는데 공격성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보조가드를 달고 리딩을 하는 PG"라는 표현이 KBL출범이후에 자주 나오는데(세컨가드의 중요성을 말한 표현이죠.)전성기의 허재는 PG를 보조하는 세컨가드라기 보다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PG강동희가 보조해주는 "PG를 달고 게임을 지배하는"득점기계였죠.(역대 최고의 PG라고 평가받는 강동희를 달고 공격을 하는 선수..정말 대단하죠?)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하기는 했지만 "포인트가드"라기보다는 "패서"의 그것이었습니다.
국내무대에서는 코트어느곳에서던지 그의 1대1공격에 의한 득점을 막을선수가 없기때문에 스스로 게임리딩을 할필요가 없었죠.
02~03시즌전에 "PG"허재의 모습을 간간히 볼수있었던건 국제대회였는데..
얼마전 논란이 되었던 88 올림픽 유고전에서의 허재는 포인트가드였습니다.
전반전에 21득점 5스틸을 기록했고 후반전에 페네트레이션에 이은 패스아웃은 너무나 위력적이었다는..
188의 스피드와 파워가 뛰어난 24세 포인트가드 허재라면 국제무대에서도(NBA같은곳)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을 것이지만..
근데 국제대회는 경기수가 적고 국내대회만큼은 아니지만 허재의 공격력은 막강했기때문에 "PG"허재가 어떤 모습이다 라고 평가하는건 매우 어려웠습니다.
KBL출범이후 기아와 나래에서의 허재는 전성기의 올라운드 보다는 전형적인 슈팅가드의 움직임이었고...
▶포인트가드 허재
02~03시즌 포인트가드 허재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단순하지만 확실한 공격루트를 이용하는 PG였습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건 김주성에게 연결되는 A패스였는데..페이트존에서 김주성이 움직이기만 하면 그에게 어김없이 허재의 어시스트가 연결되었습니다.
공간을 만드는건 김주성 스스로 하는것이고 공간이 만들어지는 정확한 타이밍을 어제는 귀신같이 알고 어시스트가 연결되는 것이죠.
나이가 들어서 많이 움직일수 없는 허재의 단점을 김주성스스로 많이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면서 커버해주고 허재의 타고난 센스와 정확한 상황판단능력 패스타이밍포착은 김주성의 압도적인 높이와 만나면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죠.
다시말해서 "루키"김주성은 허재의 단점을 커버해주고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허재가 만세를 부를만한 그런 존재였습니다.
(지금의 김주성과는 좀 다른 움직임입니다.지금은 공격전술의 핵 이죠.김주성의 기량은 프로데뷔와는 비교할수없을정도로 발전했다 생각하지만 득점스탯은 오히려 떨어지는 이유가..허재처럼 김주성의 높이를 득점으로 활용할수있는 PG가 없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주성에 대한 A패스 이외에 허재가 자주 이용하는 루트는 로포스트의 데릭존슨의 1대1공격이었죠.
많이 이용하기는 했지만 다른 PG들과 비교해서 그렇게 특별한 방법은 아닙니다.
이 두 공격이 여의치 않을때 나오는 허재의 선택은 잭슨의 아이솔레이션이었는데 이건 허재의 능력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습니다.
허재는 단점도 많은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TG는 2쿼터와 4쿼터는 허재,1쿼터와 3쿼터는 김승기가 뛰는 그런 선수운용을 했는데 김승기에 비해 허재의 공 소유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그렇지만 김승기보다는 허재가 뛸때 TG의 공격성공률이 훨씬 더 높았죠.)
거기에다가 너무 김주성-데릭존슨의 공격빈도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양경민-잭슨등 다른선수가 공을 잡을 시간이 별로 없었죠.
그리고 순발력이 떨어지면서 돌파횟수와 위력이 전성기의 20%에도 미치지 못했고 손목의 탄력과 점프력이 떨어지면서 야투시도와 성공률도 그다지 좋지가 못했습니다.
빠른가드의 순간적인 압박에 밀리면서 스틸을 많이 허용했고 속공상황에서 패스미스가 많았습니다.(이건 허재뿐 아니라 강동희등 노장가드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자신의 떨어진 순발력과 손목탄력등을 생각하지 않은채 전성기때의 감각을 이용해서 패스를 하니 패스가 짧고 정확도가 떨어지는건 당연한거겠죠.)
수비에서도 빠른가드들을 막는데 굉장히 부담을 느끼면서 고전을 했었구요.(김승현이 대표적으로 생각나네요.챔프전에서 안타깝게도 공격에서 높이를 살리는 포스트업을 한차례도 성공시키지 못한것은 물론 수비에서도 김승현을 거의 막지 못했습니다.)
허재는 이런 단점이 많은 포인트가드였고 40가까운 나이때문에 20분정도밖에 뛸수 없었지만 그가 코트에 있는것만으로도 팀원들에게 굉장한 힘을 주었고(이건 양경민선수가 수도없이 많이 밝힌 내용이죠.)공격에서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는 형평보다는 효율을 택한 포인트가드였습니다.
김주성은 스스로 공간을 많이 만들면서 김승기는 교체시에 상대가드를 강하게 압박 체력부담을 주면서 노장을 도왔습니다.
주제에서 좀 벗어난 애기지만 02~03시즌의 TG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서로 커버해주는 그런 끈끈한 팀이었죠.
이상 포인트가드 허재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해봤는데 좀 오래된 기억이라 맞는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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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게시물을 몇 개 읽다보니 허재가 성인국대에서 중국을 격파한 적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허재가 성인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은 1985년 쿠알라룸푸르 ABC였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죠. 1학년때 부터 이미 국대주전가드의 자리는 허재의 차지였습니다만 1984년에는 한국남자농구가 성인대표팀을 구성한 적이 없죠. 대신 1984년 봄 중국과의 아시아청소년남자농구 대회 결승전에서 맹활약하며 허재의 대 중국전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어쨌거나 허재는 그 이후 10년 이상 대표팀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활약하면서 중국과 많은 좋은 & 아쉬운 승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중국에게 전패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우승을 다투는 결승전에서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면서(후웨이동의 파울로 허재가 실려나간 후 역전패 등) 패배를 거듭했기 때문에 농구팬들에게 그런 인상이 박힌 듯 합니다다만, 실제로 허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인국대레벨에서 중국을 격파한 적이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 중국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오히려 1982년 아시안게임과 1997년 ABC대회(이 대회에서도 결승에서 중국을 격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승은 대 일본전) 사이의 기간 즉 허재가 대표팀 주전으로 출장했던 기간 동안 허재가 출장하지 않고서 중국에게 승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참고로 ...
현재 뛰고 있는 선수 중에 성인국대에서 대 중국전 성적이 가장 좋은 선수는 김주성일 겁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의 대 중국전 승리가 매우 감격적이었고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승리가 있죠. 2001년 5월 오사카 동아시아 대회 입니다. 이 대회에서 김주성은 댈러스 매버릭스의 현역 NBA리거 왕즈즈(214cm)와 이후 NBA 드래프트 1위로 픽된 야오밍(223cm)이 모두 출장한(!) 중국성인국대를 격파합니다.
부산아시안게임에는 왕즈즈가 출장하지 않았고, 한국에서는 프로올스타가 총출동한 반면 이 대회에는 서장훈도 현주엽도 출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인사이드에서 원센터로 야오밍, 왕즈즈와 맞서 양팀 합계 최다득점(28점 이었던가 ... 기록이 잘 안찾아지네요)을 거두며 승리를 끌어내죠. 선수구성만으로 보자면 1997년 이상으로 충격적인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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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올려봅니다.
저는 실업농구 시절부터 농대시절을 거쳐 프로농구에 이르는 지금까지 농구를 좋아해온 오랜 농구팬입니다.
허재 선수에 관한 게시판 글들을 검색해 보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의견을 두서없이 적어봅니다.
1. 한국 역대 최고선수로서의 허재
일단 우리나라 농구는 허재 이전과 이후가 다릅니다.
슈터 위주로 외곽슛 위주의 농구를 구사해온 한국농구계에 허재라는 올라운드 테크니션의 등장은 센세이션에 가까웠습니다.
nba를 접하기 전 우리나라 농구팬들은 허재가 펼치는 기술농구에 먼저 매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허재 선수는 거의 40에 가까운 나이까지 현역으로 선수생활을 함으로써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그의 커리어 사상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가 속한 팀은 모두 우승을 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nba로 치면 매직 존슨 선수가 있습니다.
일단 99년도인가 우리나라도 20세기를 돌아보면서 각 스포츠 분야별로 역대 최고선수를 전문가 집단에서
투표로 선정했는데
축구는 차범근, 야구는 선동렬, 그리고 농구는 허재가 신동파, 이충희를 젖히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nba에서는 비슷한 투표에서 마이클 조던이 1위를 차지했죠.
허재가 역대 최고선수로 꼽혔다면 그의 인성부분의 약점에 불구하고 농구기량만큼은 이의를 달기 어려울 정도의 압도적인 면, 훌륭한 신체조건과 힘, 체력, 유연성 운동능력 등의 탁월함.
그리고 농대시절부터 은퇴시까지 9번에 걸친 우승경력.
등등. 개인기량과 우승실적 등을 고려한 결과일 것입니다.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한국 역대 최고선수로서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중대 및 기아시절 독주에 대해 동료들이 너무 뛰어나 진정한 평가가 어렵다는 견해에 대해서
일단 개인적으로도 기아 시절 너무 최고의 선수들이 집중되어서 허재선수의 자기 계발이 중단되고 매너리즘과 술에 빠지게 된 허재 선수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아시절 농대 5연패 등 7번 우승에서 최고의 공신이 허재였는지 김유택이었는지 사실 다소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각 팀 감독들의 입장은 거의 반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분명 한기범, 김유택의 고공라인은 당시 무적을 자랑했던 것으로 허재 없이도 기아는 이미 강팀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점이 허재의 커리어를 평가절하할 명목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선 기아의 첫 우승은 허재의 입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허재 입단 전, 유재학, 강정수,정덕화, 김유택, 한기범 라인으로 기아는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물론 준우승도 대단하지만 4강에서 현대를 꺾을 때에도 종료직전 유재학 선수의 하프라인에서 던진
슛이 기적적으로 들어가서 연장승부로 가면서 이겼죠.
강동희 선수 입단으로 무적 기아라인이 완성되었지만 강동희 선수 입단 전에 이미 우승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NBA를 봐도 역대 최고선수 평가에서 2위권을 형성하는 매직 존슨의 경우를 보면
레이커스에는 당대 최고의 센터 카림 압둘 자바를 비롯 기라성 같은 올스타급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80년대 5번의 우승을 일구어 내는데 자바, 제임스 워디, 바이런 스캇, 그린 등의 빅 스타들의 공헌이 엄청나지만 그렇다고 매직의 5회우승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지는 않습니다.
라이벌인 래리 버드의 보스턴의 경우도 버드 말고도 엄청난 스타들이 포진해 있죠.
60년대 보스턴 왕조 11회 우승의 경우 빌 러셀 말고도 라인 업 중에 명예의 전당 멤버가 대부분인 화려한
동료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빌 러셀의 업적이 과소평가되지는 않습니다.
몇몇 분들이 허재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사기 라인업이 아니었을 때 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분명 그런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용산고 시절. 용산고는 고교무대를 완전 평정했었는데 당시 센터는 이민형 선수로 190센티였죠.
한만성이라는 슈터, 허재, 이민형이 용산고 트리오였습니다.
그리고 중앙대 입학 직후의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역시 195이상의 센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유택, 한기범이라는 트윈타워와 더불어 대학 농구를 평정했을 당시는 뭐 그렇고
한기범, 김유택이 차례로 졸업한 직후 중앙대는 여전히 대학 무대를 평정했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당시 허재는 한경기 75점을 넣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경기에서는 센터 포지션을 소화하기도 했습니다.
중대 센터진이 정상급은 아니었죠. 물론, 최고의 포가 강동희가 콤비로 함께 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빅 센터 없이 강동희와 허재의 가드콤비가 마치 키드-카터의 뉴저지와 같은 멤버로 대학무대를 평정하였죠.
다음은 실업무대에 와서입니다. 5연패시절은 그렇다 치고
5연패 시절이후 한기범 선수는 현저히 노쇠하고, 김유택도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의 등장이후 최고 센터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됩니다.
그 유명한 94-95시즌 기아가 다시 정상을 탈환할 때
서장훈이 버틴 연대에게 연장에서 무너지긴 했지만 당시 허재는 4쿼터 말미에 연속 득점을 하면서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가는 등 고군분투하면서 팀을 지탱합니다.
연대에는 패했지만 플옵 4강에서 고대를 꺾고 결승에서 삼성을 꺾는 등 당시 허재 최전성기의 플레이를 볼 수 있는데 김유택 등 센터진은 노쇠해서 최고의 인사이드진은 못되고 조동기가 김유택을 뒷받침했죠.
결승에서 연속 17득점 등 최고의 플레이로 우승을 이끌며 다시 MVP를 차지한 이 시즌의 허재를 보면
그의 진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대회에서 한국이 외국팀에 비해 전혀 인사이드 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지만
허재 선수의 놀라운 활약으로 접전을 펼치면서 허재는 자신의 기량을 세계에 과시합니다.
프로시절에 와서
34세의 허재, 지금의 이상민 선수의 나이입니다.
당시 이,조, 추의 막강 트리오와 맥도웰, 재키 존슨 등 최고의 용병으로 구성된 현대를 맞이하여
기아는 당시 용병 한명이 태업으로 사실상 없는 상황이었고 클리프 리드가 190정도의 신장
김유택도 노쇠화해서 풀타임 소화가 어려웠고.
이런 상황에서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7차전까지 가는 접전으로 이끈 것은 분명 허재의 힘이었죠.
그것을 평가받아, 유일하게 준우승팀에서 MVP가 선정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뭐 글이 길어졌지만
요컨대 최고의 동료들, 특히 최고 센터들과 같이 했다는 것은 허재 선수의 복이기도 하지만 자바와 같이한
매직존슨이 이로 인해 폄하되지 않듯이 그로 인해 허재의 9개의 우승반지의 가치가 퇴색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허재는 9개의 우승반지외에 개인기록에서 농대 통산 득점2위, 어시스트1위, 리바운드3위의 놀라운 개인 커리어를 지녔고(프로 출범이전 농구대잔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무대였음이 분명하죠)
농대시절 MVP3회, 득점왕2회(평균득점으로 득점왕을 뽑을때 1회, 총득점으로 득점왕 뽑을때 1회)
어시스트왕1회, 스틸왕 다수, 수비왕2회 등 통산기록뿐만 아니라 시즌 타이틀도 고루 차지한 공수에서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었습니다.
프로에 와서도 파이널MVP1회, 트리플 더블 2회 등 나름대로 노장선수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죠.
그리고 전반적으로 최고 동료들과 함께 해서 비교적 쉽게 우승을 차지했지만
간혹,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었을 때 오히려 허재선수의 불굴의 투혼과 지배력을 볼 수 있는, 허재 선수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경기들도 상당히 많았고,
이런한 그의 모습들로 인해서 최고 선수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재 선수의 오랜 팬으로서 그의 인간적인 결점들이 좀 아쉽지만
농구선수로서 기량과 실적만큼은 최고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업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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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글도 허재에 대한 글도 아닌 애매한 개인적인 추억담입니다.
- 허재 이야기에 앞서 잡담 100만개
은퇴경기를 코앞에 남겨놓은 지금 이제는 더 이상 전국을 누빌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듭니다. 농구야 여전히 좋아할 것 같지만 아마도 지방까지 내려갈 정도는 아닐 겁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데 지금 농구계는 아직 이 갈대를 잡고 흔들 걸로 보이는 인재가 눈에 띄지 않고 있고...(웃음)
시즌이 끝나고 받아본 4월분 카드 영수증은 페이지를 넘겨가며 지출내역란을 티켓링크(&파크)와 철도청만이 빼곡이 메꾸고 있어 무안할 정도였습니다. 평소 돈 쓰는 방식은 그 사람을 대변한다라고 역설하고 다녔는데 막상 너무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니 핍폐한 생활이 떠올라 참 얼굴이 홧홧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나마 위로되는 것은 나보다 더 심한 몇몇 분이 있다는 사실 뿐....(흐흐)
아무튼 허재에 대해 말하는 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글이 자꾸 지지부진 길어집니다. 어째 이번에도 스크롤의 압박이 장난아닌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급하신 분은 백키로 돌아가시길...^^;;
다른 분들이 허재에 대해 적어주신 글을 읽으며 즐거워하고 공감도 하고 흐뭇해하기도 하고 또한 가끔 있는 부당한 폄하에 분노도 할 수 있지만 저보고 '허재'에 대해 말하라면 갑자기 입이 무거워 집니다.
이만큼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입에 오르내린 사람도 없고 또 안 밝혀진 것 없이 샅샅이 밝혀져 새삼 무얼 말해야 되나 싶은 사람도 없는데 또 막상 세대교체가 빠른 농구판에서는 벌써 허재를 잘 모릅니다. 단지 소문만 무성히 떠돌 뿐...
그래서 누굴 대상으로 얘길 해야 하나 조금 고민됩니다. 아는 분들과 추억을 나눌까 아니면 허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그를(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볼까.
그러다 불현듯 제가 감히 허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얘기하기엔 한참 자격미달이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선은 "허재는 누구다'라고 말할 만큼 허재의 플레이를 처음부터 자세히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초고교급 거대어 허재도 모르고 중대와 기아 초기의 괴물 허재도 모릅니다. 나중에 그때 테이프야 몇 개 봤지만 그 당시의 허재는 어떻다라는 소릴 하기엔 어림없습니다. 게다가 선수란 말로 해서는 좋아지지 않습니다. 플레이를 직접 보고 느끼는 거지...
그래서 허재에 대한 제 얘기는 주로 조금씩이라도 허재를 아는 분들과 추억을 나누는 형식이 될 것 같습니다.
허재팬이 된 경로는 다 각각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처음에는 그냥 농구팬 그것도 주로 여자농구를 보는 팬이었다가 급작스럽게 허재팬이 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어렸을 땐 농구를 몰랐고.;;
스포츠에 관심 없는 아버님에 밑으론 여동생 뿐이라 같이 스포츠에 대해 말하긴 커녕 집에서는 경기 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몸치라 그런지 곧잘 스포츠에 매혹되곤 했습니다.
어렸을 때 관심(집에서 가끔이라도 볼 수)있던 종목은 레슬링과 권투 그리고 고교야구(특별히 고교야구라고 한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상당히 집중하는 편이라 해설자의 말을 유심히 듣고 룰을 배우는 건 빨랐는데 그에 반해 누군가 곁에서 설명해주거나 편견을 고쳐 줄 사람이 없던 만큼 이해방법에서는 아주 뒤죽박죽 엉터리였습니다.
야구에 대한 이해는 그중 최악이었는데... ^^;;;
제가 국민학교 저학년일 때는 최고였던(그리고 내가 응원한) 팀이 군산상고였는데 4학년 5학년 점점 고학년이 되면서 라이벌로 선린상고란 학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가 말입니다 체격도 좋고 하얀 얼굴의 선수들이 엔트리를 꽉 채우고도 후보까지 즐비한 겁니다.(당시 고교야구는 빠듯한 인원인 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린 마음에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으로 보이는데 선린상고에서는 꼭 마동탁 같은 타자들이 나와서 군산상고의 마르고 거무잡잡한 에이스의 공에 번트를 댑니다.
"번트라니...!!!"
안타(홈런)냐 아웃이냐 두가지밖에 없던 어린아이에게 번트나 도루는 상당히 치사한 속임수로 보였습니다. 이미 체격적인 요건도 인원에서도 불공정(??)하게 시작했는데 지치고 평정심을 잃은 투수가 실투를 하기 시작하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응원하게 됩니다. 찢어지는 가슴으로 보던 저는 드디어 안티 선린상고(컥;;)로 변해 그후 마산상고, 경복고등학교 등 선린상고에 대항하던 지방학교들이라면 줄창 응원했습니다. (<= 여러분 주위에 스포츠 처음 보는 분들에게 귀찮아하지 마시고 잘 가르쳐 주십시오. ^^;)
번트조차 속임수로 여기던 어린애가 중학생이 되어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흥미를 못 느낀 이유는 알만 하실 겁니다. 근데 나중에 야구보다 훨씬 속임수 많은 농구팬이 되었으니...후후
한국 권투는 점점 조짐이 안 좋더니 88올림픽을 기해서 급격히 쇠락했다는 느낌이고 레슬링은 그보다 훨씬 전에 짜고 하는 게임이라는 소문이 돌고는 급기야 인기가 사그라 들었습니다.(지금 WWE를 생각해보면 참...;;;)
그걸로 스포츠팬 노릇은 이제 그만....인가 싶었는데...88올림픽 중간 어느 구기 종목에 반하게 말았습니다.
중국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던 한국여자농구는 재치 있고 시원시원한 플레이, 신장과 체격의 열세를 극복하는 투지, 코트를 수없이 뛰어 다니는 스피드와 박진감으로 한눈에 시선을 잡아챘습니다.
처음 시작으로 국대를 좋아한 탓에 여자농구에 대한 애정은 내내 범애적 입니다. 각 팀마다 한두 명씩은 골고루 좋아하는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고 특별히 어느 팀을 편들기보다는 그냥 게임을 즐겼습니다.
그때 남자농구에 흥미를 못 느꼈던 이유는 경기 자체는 파워풀하고 스피디한 대신 선수들이 작전에 대한 이해가 좀 떨어지지 않나 해서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농구에 대해 잘 몰랐던 데서 나온 편견이 컸는데 여농은 패턴이 많았던 반면 남농에서는 자유스타일이 많은 차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 여자농구는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특히 제가 농구를 보기 시작한 88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남자리그 못지 않게 빠방한 여러 실업팀(태평양, 삼성생명, 한국화장품, 선경 등등)들이 격돌해 화려한 게임을 보여줬습니다. 박찬숙, 성정아, 정은순, 전주원, 유영주, 정선민, 김지윤 끊임없이 세대교체 되고 수급되는 선수들 면면도 정말 화려했고....
아무튼 그리하여 그 무렵 남자농구에 대한 제 추억은 상당히 띄엄띄엄합니다. 점점 직장생활이다 뭐다 해도 농구 볼 시간도 적었고... 남자 농구나 가끔은 TV에서 해주면 즐겁게 봤지만 그걸로 그만... NBA는 챙겨 보기가 어려워 더욱 열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어느 리그가 다른 리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팬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남자농구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선수는 없지만 그래도 허재는 굉장히 눈에 띄었습니다. 누가 봐도 허재는 코트에서 빛났고 남자농구를 띄엄띄엄 본만큼 더욱 기억에 각인 될 수밖에 없습니다.
93, 94, 95년 남자농구 판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허재란 한 사람에게 퍼부어지는 집중 포격은 어딘가 부당하다고 보여졌습니다. 별 신경 쓰지 않고 읽는 신문기사는 툭하면 기아란 팀이 허재의 개인플레이 때문에 졌다고 쓰여졌습니다. 신문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정도가 아니라 열탕과 얼음물을 오갔습니다. 거대한 활자로 허재를 극찬하는 기사가 쓰여지는가 하면 내 기준으론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 일로 죽일 놈 취급하듯 비난에 비난을 거듭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매일 술 마시고 매일 싸움이라도 하고 다니느라 언제 농구를 하는지 의심스러운 허재에 대한 전설은 혐오감보다는 어딘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먼저 들게 했습니다.
그냥 상식으로 생각해봐도 운동 선수라는 게 잘되는 날이 있으면 잘 안 풀리는 날도 있는 건데 많지 않은 기아의 패배 날에는 반드시 허재가 뭔가 태업이라도 해서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졌다는 식의 기사는 사람을 가장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선수가 도대체 얼마나 영향력이 크기에 매 게임 승리와 패배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허재에게 관심을 갖게 됐던 건 아마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덕(?)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나는 허재에 대해 주목하게 됐습니다.
- 성격의 농구
신조가 원래 연상의 지인이나(특별히 친해질 생각 없는) 좋아하는 작가, 음악가, 운동선수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않는 이상 개인적인 면을 파고들지 않습니다. 어느 만큼의 거리는 근거 없는 낭만주의자의 정신건강에도 꼭 필요하고 조금쯤 세상을 행복하게 살게 해줍니다.(^^)
하지만 허재는 그걸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농구만 보려 해도 그의 농구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그의 성격이기에 농구와 성격은 허재에게서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허재 팬들에게 허재는 단순한 농구선수를 떠나서 영웅입니다. 물론 저 역시 허재가 코트에서 얼마나 자주 영웅적인 투혼을 보여왔는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저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고...
하지만 나에게 허재는 그의 솔직한 성격과 그가 보여주는 멋진 농구로 충분합니다. 그 외 부분은 전부 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근데 농구와 성격 둘 중에서 어느 면이 더 좋은가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성격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뛰어난 드리블, 2수 앞을 내다보는 날카로운 패스, 안정적이고 현란한 스탭, 공감각적인 넓은 시야, 1급 PG에게서나 볼 수 있는 노련한 게임조율능력, 동양인으로는 탁월한 신체와 스테미너 등등 이런 외형적인 것들이 그의 농구를 이루는데 90을 차지한다면 나머지 10%를 채우는 성격은 그만의 농구를 만드는 특질입니다.
앞으로 아마도 그보다 뛰어난 기술에 그보다 나은 하드웨어를 갖춘 선수가 여럿 나오더라도(나와야 되고) 허재만의 그 개성은 그를 다른 선수들과 구분하게 해줄 겁니다.
시소게임에서 보여주는 무서운 집중력, 객관적 열세가 보이는 상황에서도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악착같은 오기,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기백, 어려운 상황일수록 솟아나는 투지, 영광의 순간을 상대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거의 심술;에 가까운 집념,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에 가까운 믿음, 초등학생이랑 싸워도 일단 승부가 걸리면 얄짤 없지 않을까 싶은 치사할;; 정도의 승부욕,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낙천성', 거기에 주위사람에게 보여주는 무한한 애정과 신뢰까지...(어째 말이 길어지다 보니 팬이 아니라 안티인 듯... ^^;;)
이런 마인드적인 면은 허재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에 있었는가는 알려주는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두고 세상에서는 툭하면 농구는 잘하지만 인간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릴 듣습니다. 뭐 조금(?)은 허코치님 자신의 탓이 없지 않지만 한발 떨어져서 생각해도 너무 부당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자에게는 발굽이 없습니다."
허재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은 허재가 욕먹고 있는 부정적인 면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갖추고 저것도 갖춘 초인이란 현실엔 없습니다. 만약 있다해도 발굽을 달고 있는 사자처럼 대단히 부자연스러울 거고...
단지 타인의 눈에 띄는 공인의 자리에 있고 보면 어느 정도 자신을 숨기고 대외적인 얼굴을 만들기 마련인데 허재는 신기할 만큼 그런 면에 둔했고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반발을 정면으로 부딪치기만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위선적일 정도로 도덕자연 하는 언론들의 집단 다구리는 한 개인에 대해 뭔가 좀 병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혐오를 만들었습니다.
허재를 좋아하면서 참 신기한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내가 허재를 좋아한다는 걸 알자마자 자기가 얼마나 허재를 싫어하는지 굳이 몇 번씩이나 알려주고 싶어하는 사람, 근거를 알 수 없는 스캔들과 케케묵은 고리짝 전설들을 들고 와 굳이 알려주고 싶어하는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려 하는 사람...
점점 다른 사람에게는 허재에 대해 말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함성의 하나가 허재에게
내가 허재에게 호감 갖게 된 것은 그가 가장 고약한(^^;) 얼굴을 하고 다닐 무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 원래 표정이 저런가 했는데 더 지켜보자 그저 좀 삐진 것뿐이라는 걸 깨닫고 어처구니없어 '풋'하고 웃음이 터졌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몰고 왔던 연고대세에 대해 그가 보여줬던 어린애 같은 발끈과 심술, 그리고 과장된 허세는 나보다 몇 살 위인데다 결혼도 해 애까지 있는 아저씨를 무지무지 귀엽다고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딱 두 번(오늘로 세 번이지만) 유니폼을 입지 않은 허재의 모습을 봤는데 그 처음이 허재, 이상민, 전희철, 우지원, 김영만 등등 쟁쟁한 농구스타들을 잔뜩 불러모았던 사인회로 기억합니다.
어른(;;)이 이런데 가도 되나 하는 점을 몇 번이나 고민하던 저는 드디어 사인회장에 줄을 섰습니다. <- 원래 20대 후반의 어른스러움;;은 30대를 능가하게 법이랍니다.(웃음)
하지만 어려운 결심이 무색하게 사인을 해줘야 할 당사자인 허재는 괘씸하게도(^^;;;) 김영만이나 이상민이나 전희철 등에게 이것저것 참견하기만 할뿐 착실히 앉아서 사인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용감하게 다가가 사인을 신청한 팬들에게는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습니다만... ^^
그렇습니다.
우리의 허코치님(당시야 코치는 아니었지만)은 이상민의 사인줄과 자신의 사인줄을 비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피식 웃고 돌아섰습니다.
그런 자존심은 종종 거만함과 팬에 대한 무례로 해석되었지만 그가 팬을 무시한다는 생각은 사실과는 전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허재는 지금껏 내가 본 어떤 농구선수보다 팬들의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것도 어린애 같이 독점적이고 자신만을 향한 사랑을 원합니다. 그런 사랑이 공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몸이 부서져라 뜁니다.
그의 "나만 봐줘"라는 오라가 얼마나 강한지 잘난 체하고 편안히 농구 보던 저를 언제까지나 뒷짐지고 있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ps 1.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다음으로... 다음엔 조금이라도 농구 얘기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2. 어째 쓸수록 허코치님이 자꾸 망가집니다.ㅠ_ㅜ;; 뭐 이런 시각도 있다는 관용의 시각으로..퍽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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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오리온스 對 원주 TG삼보 엑써스 대구 실내 체육관
허재는 허재였다
솔직히 난 허재가 전성기 적에 어떤 플레이를 펼쳤는지 잘 모른다.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전성기 때 얼마나 많은 득점을 올리고, 얼마나 많은 어시스트를 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으면 아직까지도 '농구 천재' '농구 9단' '농구 대통령'으로 불리는 지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난 최근 몇 년 사이 허재가 대단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먼저 1997-98 시즌, KBL 역대 최고의 챔피언 결정전인 그 때, 처음 그의 투혼과 집념에 놀랐다. 그리고 지난 시즌, 김주성에게 보여주었던 '내리사랑'과 우승에 근접한 팀을 위한 악착같은 플레이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보여준 투혼까지. 최근 몇 년 사이 그에게 몰랐던 부분을 보는 순간들은 이외에도 다수다. 은퇴를 1년 보류하고 올 시즌에도 허재는 팀을 위해서 승부처 때 '조커'로 투입돼 카리스마로 코트를 휘어잡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고는 했다. 이날 경기도 허재가 엮어낸 승리 중 하나였다.
허재는 21분 38초 동안 출전해 10득점(3점슛 2개),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우리나이로 40세이며, 오는 9월에 마흔 번째 생일을 맞는 불혹의 선수치고는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날 역시도 기록으로 증명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있었다.
TG삼보의 1쿼터는 답답했다. 앤트완 홀이 이지승, 오용준 등 물량공세를 하는 오리온스 수비들을 상대로 제 몫을 해냈지만 양경민은 상대 주포인 김병철의 스피드를 따라가는 것에 주안점을 두느라 공격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신기성도 변칙적으로 기용된 박지현의 수비에 당하고 있었다. 답답했던 1쿼터를 보고는 전창진 감독은 허재를 2쿼터에 투입했다. 그러나 2쿼터에 기록상으로 특별히 남은 것은 없었다. 김승현을 제치고 성공시킨 드라이브 인 2득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허나 역시 기록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 있다. 오리온스는 1쿼터 내내 김주성과 리온 데릭스에 앤트완 홀에게까지 골 밑 공략을 수도 없이 당했다. 다행히 1쿼터 후반부에 다시 따라잡았지만 고질병인 '안방 내주기'를 또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2쿼터에는 존디펜스로 골 밑을 방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홀이 나갔기에 외곽도 약해졌겠다 상대의 무차별한 골 밑 공략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은 존디펜스였다. 하지만 오리온스는 존디펜스를 쓸 수가 없었다. 바로 허재가 코트에 존재한 상황이었기에. 경험이 쌓일 때로 쌓인 백전노장 앞에서는 아무리 유기적인 존디펜스라 할 지라도 허재의 패스 하나에 골 밑과 외곽을 모두 허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딱 한 번 존디펜스를 하다가 오리온스는 포기하고 말았다. 허재의 날카로운 패스에 순간 오리온스의 존은 흔들렸었다. 2쿼터는 어떻게 보면 오리온스 페이스로 갔어야 했다. 인사이드만 지켰으면 김병철이 내외곽을 휘저은 2쿼터에 확실한 우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허재의 존재로 인해 오리온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40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허슬 플레이도 TG삼보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3쿼터에서 다시 허재의 진가는 발휘됐다. 3쿼터에 오리온스가 바비 레이저와 아이작 스펜서가 적극적으로 로 포스트를 공략, 분전하며 점수를 조금씩 벌리자 TG삼보도 김주성을 필두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2%가 부족했다. 그 2%를 허재가 메웠다. 3쿼터 3초 남은 시점에서 허재는 3점포를 작렬시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치밀한 김진 감독에게 4쿼터를 3점 앞서서 시작하는 것과 동점으로 시작하는 것은 분명 큰 차이다. 허재는 이 한 방으로 김진 감독을 한 번 죽였다.
4쿼터에 허재는 풀로 뛰었다. 홀이 4파울로 파울 트러블에 걸린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승부처에서 전창진 감독은 홀을 기용하지 않았다. 홀은 그저 벤치 뒤에 몸만 풀고 있을 뿐이었다. 전 감독은 홀이 상대 수비에 집중력이 떨어져 팀 플레이를 깎아 먹는 다는 것을 간파해, 산전수전 겪은 허재에게 전권을 맡겼다. 또 신기성이 가끔씩 승부처에서 자신의 엄청난 스피드를 주체하지 못해 완급조절 면에서 약간 부족한 부분도 있기에 그런 부분을 보완하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허재는 그러한 전 감독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보다 공격적인 활약을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접전이 계속되던 4쿼터 중반부터 TG삼보는 신기성의 미들 슛, 데릭스의 미들 슛, 김주성의 자유투 2개로 78-72로 점수를 벌렸다. 모두 허재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었다. 속공 상황에서 신기성에게 연결한 깔끔한 패스, 데릭스에게 연결한 노련한 패스, 상대의 파울을 유도한 김주성에게의 백 패스 모두 그의 천재적인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이었으며, 패스들이 모두 속공과 지공에서 골고루 나온 것이기에 그의 위력적인 완급조절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오리온스가 김병철과 레이저의 득점으로 쫓아오자 TG삼보는 신기성의 3점슛과 김주성의 골밑슛으로 점수를 벌렸다. 그리고 종료 2분 5초 전(이 시간을 당분간 잊을 수 없을 듯. 백보드 뒤쪽에 있던 나에게 샷 클락의 2:05는 절망이었기에...) 허재는 24초 공격 제한 시간과 동시에 김승현의 위로 떠올라 통렬한 3점포를 꽂아 넣었다. 그의 해결사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또 같은 순간 김진 감독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허재의 이 한방은 쫓아갈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김진 감독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이후에도 TG삼보는 허재-신기성-데릭스라는 '쓰리가드(?)'의 마지막 지키기 게임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허재와 신기성은 물론 데릭스까지 리딩에 나섰는데 그는 대단히 안정된 볼 키핑 능력과 함께 드리블 수준을 갖추었다. 시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막판 상대의 파울 작전으로 얻은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켰다.
이날 박지현의 활약은 좋았다고 볼 수 있다. 김승현의 천적이 된 신기성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는 데 성공했으며 무리한 3점슛 남발도 없었다. 수비에 치중해서 그런지 정작 공격에서 속공을 진두지휘하지 못해 오리온스 특유의 속공이 적게 나왔지만 무리 없는 리딩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허재가 나온 2쿼터부터 허재의 카리스마에 말렸는지 허재 템포에 말려드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으며 이는 4쿼터에 투입된 김승현도 마찬가지였다. 프론트 코트에서부터 무섭게 달라붙으며 수비하는 마흔 살 허재의 모습에 그들은 위축됐음에 틀림없었다. 약 22분을 뛰고도 허재는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대단한 선수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TG삼보의 김주성의 활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김주성은 정말 물이 올랐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레이저를 상대로 적극적인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꼬박꼬박 득점을 올렸다. 포스트 업 후 터닝을 하며 레이저를 걸고 나와 몸이 약간 휜 상태에서 던진 슛은 백발백중으로 백보드를 맞고 림을 갈랐다. 확률 높은 야투율 역시 좋았다. 또 그는 후반부터 고비마다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TG삼보의 공격기회를 증대시켰으며 이는 전날 경기에서 격전을 치른 오리온스 선수들의 집중력과 정신력을 더욱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은호, 레이저, 스펜서 등이 번갈아 가며 김주성을 막았지만 김주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대 바스켓을 공략해 강력한 MVP 후보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허재와의 변함 없는 콤비 플레이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TG삼보는 비록 외곽 공격이 꽉 막혀 답답한 부분도 있었지만 고비 때 허재의 영웅적인 활약과 함께 김주성이 버티는 골 밑 우위는 압권이었다. KBL 최고의 백코트 진으로 평가받는 오리온스와의 백코트 싸움에서도 TG삼보는 이겼으며, 승부처 때 보여준 조직적 수비 역시 그들이 많이 단련된 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현재 페이스라면 부상이라는 큰 변수가 없다면 TG삼보는 정규리그 역대 최고 승률로 우승을 노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천적관계'의 사슬을 끊으려했던 오리온스에게 이날 패배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오리온스는 이날도 어떻게 보면 외곽포를 남발했다. 23개 던져서 7개. 오늘따라 스펜서와 레이저가 유난히 적극적인 인사이드 플레이를 펼쳐서 그런지, 아니면 폭발적으로 연속으로 터지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경기장에서 느끼기에 그들의 3점 시도가 전보다 적지 않았나 싶은데 그게 아니었다. 양날의 검을 버리는 가 싶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이날 역시 3점이 던진 만큼 안 터진 것이 오리온스 입장에서 안타까웠다. 그리고 골 밑 싸움에서 밀린 것이 뼈아팠다. 공격에서는 어느 정도 됐지만 수비에서 그들의 골 밑은 무인지경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공격 리바운드를 빼앗긴 것이나 김주성에게 계속 뚫리는 것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게다가 김진 감독 마저 "높이에서 밀렸다.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라고 말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오리온스는 초반에 박지현과 이지승을 투입해 수비를 강화하는 전략을 내세웠는데 이는 전반까지 성공했다. 홀을 막기 위해 이지승, 오용준, 박재일 라인으로 인해전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수비를 강조한 탓인지 오리온스 공격의 핵심인 김승현의 투입 시간이 너무 적었던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김승현은 경기를 오래 뛰면서 몸이 풀리며 자기 플레이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스타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김진 감독은 너무 보수적이었다. 그저 김승현이 신기성에게 약하다는 이유로. 김승현은 이날 무득점이었다. 3점슛도 모조리 실패했다. 창조적인 어시스트 패스도 없었다. 이는 아쉬운 부분이다. 몸이 덜풀렸기 때문이다. 김승현을 조금이라도 오래 뛰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김승현 대신 스타팅으로 나온 박지현은 이날 분명 잘해줬다. 그러나 팀원들을 살리는 플레이는 분명 해내지 못했다. 자기 공격은 어느 정도 해줬지만 TG삼보의 조직적인 수비에 의해 팀원들을 살리는 플레이도 나오지 않았으며 속공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박재일도 김승현과 같은 경우로 역시 벤치와 코트를 들락날락해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오리온스가 홀을 막아보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홀이 나오지 않았던 4쿼터에 그를 기용하지 않은 것 역시 팬의 입장으로서 아쉬운 점이다.
김병철도 양경민의 철통같은 수비에도 이리저리 많이 뛰어다니며 20득점으로 활약 해냈는데 오리온스 포스트 맨들이 분전한 3쿼터에 그의 득점이 터져 줬더라면 오리온스는 쉽게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병철은 3쿼터에 무득점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그는 경기 내내 레이저와 함께 오리온스의 공격을 이끈 축이었기에 3쿼터 부진에 뭐라고 말 할 이유는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오리온스는 이날 경기에서 골 밑 공격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경기 막판 집중력과 정신력 부족으로 공격을 실패하고 수비에서 허재와 김주성을 비롯한 선수들에게 득점을 내줬지만 말이다. 바로 그들이 전날 LG와 격전을 벌인 반면, TG삼보는 금요일에 KTF와 경기를 하고 난 뒤 하루 쉰 덕에 체력적인 우위였다는 '어거지 핑계'라도 댈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리온스의 블랙홀로 지적됐던 인사이드 공격에서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 스펜서는 레이저의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공수에서 거의 센터들과 상대하고 있지만(이는 그가 과소평가 받는 이유 중 하나라 본다) 이날 데릭스와 김주성을 상대로 과감한 몸싸움으로 포스트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레이저도 외곽과 골 밑을 넘나들며 3점포에 의존했던 최근 플레이에서 탈피한 모습이다. 물론 이들의 골 밑 수비는 이날도 그랬고 앞으로도 여전한 구멍이 될 공산이 크다. 승부처에서 골 밑 수비에 실패하며 아깝게 놓친 게임이 한 두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 오리온스 백코트 역시 뻑뻑한 볼 흐름으로 평소의 모습을 보이지 못해 패인이 될 수 있겠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일 확률이 매우 높기에 걱정할 거리는 아니다. 문제는 단연 인사이드다. 그것도 수비. 오리온스가 인사이드 수비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김진 감독의 숙제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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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 65년생.....
이제 2004년이 됨으로써 그의 나이는 우리나이로 마흔입니다. 현재 KBL 리그에서 그와 비슷한 연배의 감독이나 코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추일승KTF감독(63년생), 장일모비스감독(67년생), 정덕화 SBS감독(63년생), 유재학 전자랜드 감독(63년생), 그 외에 코치들 거의 대부분은 허재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리죠.
그런 그에게 현재의 팀 공헌도나 수치적인 스탯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일부의 비판을 오늘 경기처럼 단 하루만에 잠재울 만한 파워를 그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주 어릴적 부터 농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벌써 농구팬이 된 지도 15년이 다 되어갑니다. 15년.... 허재가 88올림픽 기수로서 선수단 맨 처음으로 입장할 그 당시.. 그러니까 허재가 25살 때부터 농구를 봤다는 얘기네요. 뭐 그때 당시는 너무 어려 제대로된 플레이를 감상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되므로 구체적인 경기감상은 허재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는 시기. 지금의 우지원, 김병철 선수 정도 나이네요.
전 그 때 나이부터 허재의 플레이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 이후 아직까지도 `허재' 라는 이름에 사로잡혀 우리나라 농구는 '허재' 라는 공식에 얽매여 있는 속좁은 놈입니다. 지금 30대 초반의 마지막 승부 세대 선수들이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를 하죠. 허재의 농구이야기는 그 전성기가 지난 나이부터 시작해도 최고의 농구선수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허재는 31살이란 나이에 NBA 밴쿠퍼 그리즐리스(지금은 이 팀명칭이 없어지고 멤피스 그리즐리스가 있는데요) 라는 팀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허재측에서 진출을 시도한 것이 아닌 그 쪽에서의 엄연한 스카웃 제의입니다. 지금 NBA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하승진, 방성윤 등의 선수들은 NBA 측에서 먼저 입질을 한 경우는 분명히 아니구요.
허재는 정확히 말하자면 90년대 선수도 아닌 80년대 선수라고 할 수 있죠. 지금 KBL최고의 국내 선수들이 대학 시절 더 나은 기량과 전성기를 구가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오죽 허재가 잘했으면 수비 잘한다던 현대의 임달식 선수가 얼굴을 때리면서까지 막았겠습니까? (그건 싸움이었지만^^;;)
신동파 해설위원이 허재의 드리블을 칭찬하는 것도 과거의 그의 플레이를 쭉 보아왔고 허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각 팀의 코치보다, 심판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가 아직까지도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박수를 쳐 줘야 되지 않을까요?
지금 김승현, 이상민 선수 참 잘하는 선수입니다. 하지만 이상민과 김승현은 엄연히 세대가 다르고 이상민은 이제 노장축에 속하는 선수입니다. 앞으로는 김승현의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승현, 이상민.. 지금 화려한 이 선수들의 플레이는 과거 허재의 전성기에는 못 미치는것은 사실입니다.(못막아서 김승현선수나 이상민 선수를 다른 선수들이 때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
94~95 농구대잔치 삼성과 기아의 결승 마지막 경기 동영상을 보니까 그당시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기아를 노장팀으로서 체력을 극복하는게 숙제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참 재미있습니다. 허재는 노장 소리만 10년 가까이 듣고 있는거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뛰고 있습니다.)
강동희 선수도 참 대단한 선수이고 80~90년대의 한국농구의 지존 허재 그리고 강동희.. 두 선수의 은퇴식은 팀에서도 성대하게 해 주겠지요. 허재와 강동희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조던과 피펜의 관계 같다는 것입니다. 포지션은 다르지만 말이죠. 전성기가 지난 조던과 피펜은 각각 워싱턴과 포틀랜드에서 선수생활을 했죠. 지금 허재의 TG, 강동희의 LG처럼 말입니다. (물론 시카고는 기아자동차겠지요?)
아무튼 이제 두 노장을 코트에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정말 대단한 선수들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워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권력은 10년이 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허재선수 참 오랜 세월동안 장기집권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단지 코트에서 뛰고 있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단지 그것뿐이 아닌,
실력으로도... 근성으로도 아직까지 20대의 젊은 조카같은 선수들이 판치는 KBL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성기 때 우월한 기량으로 농구를 지배했다면, 지금은 나이를 먹음으로써 원숙해진 노련미와 열정....그 순수한 면이 성장했기에 그의 존재 가치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김승현 세대 이후의 뛰어난 선수들이 나와도 허재가 거품이니 라는 것처럼 김승현도 거품이다 라는 소리가 나오겠죠? 참 그러고 보면 세월은 참 빠르고 쉽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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